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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하는 기준이 많다는 것은

보람은 일을 지속하게 하는 장작이 된다

by 혜지

숫자로 보이는 결과는 엄청난 보람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잠 못 이루는 부담이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아마추어의 세계에서는 '꾸준히, 성실히'같은 단어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라도 성과가 좋지 않으면 이르게 종료되거나,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마케터가 되고 싶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숫자로 결과가 보이는 업무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늘 정하게 되는 목표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정답을 편안하게 느꼈던 나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기획할 수 있으면서도 그 결과를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떤 시점까지 나는 늘 우상향 하는 그래프, 높아지는 전환율 같은 지표를 확인하면서 일을 하는 보람을 느꼈다. 위로 곧게 뻗어나가는 그래프는 입꼬리도 같이 올라가게 했고, 전월보다 높은 지표는 일에 대한 나의 자신감도 한층 높여주었다. 그 때 나의 보람감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만들어둔 목표, 그러니까 '숫자'에 잡아 먹히기 시작했다. 맡게 되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질수록 고정된 숫자로 받아 드는 성적표는 나를 숫자에 매몰되게 했다. 목표를 상회하는 좋은 지표에도 더 이상 보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서에 표시된 숫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중요한 무언가를 자꾸만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고민이 깊어질 시기, 주변의 동료들에게 일을 할 때 어디서 보람을 느끼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같은 일을 하고 있던 동료들의 답변임에도 불구하고 답변은 다양했다.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회의 때 이야기했던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을 때, 내가 정리한 문서를 누군가 참고할 때, 이전에는 여러 사정으로 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일을 이후에 해결했을 때.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다양했다.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성장의 순간과 일을 해결한 과정, 동료들과의 관계 등 다양한 '보람감' 창고를 만들고 보람을 느끼고 있던 동료들을 통해 나는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기준을 충족했을 때 느끼는 것이 보람이 아니라는 점.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소하고 많은 기준을 갖고 있을수록 내가 느끼는 보람은 커질 게 분명했다.


나는 나름대로의 정답을 정리했다. 일을 평가하는 기준을 하나로만 두지 않을 것. 물론 회사의 입장에서 기준은 하나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일은 완전히 실패한 일이거나, 기대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은 꽤 다르게 보인다. 다음 캠페인을 위한 초석이 되었을 수도 있고, 팀 내부에서 좋은 학습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기적일 수 있지만, 결국 보람은 일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일을 지속하기 위해 자주 '보람'이라는 장작을 넣기로 했다. 가능한 많은 평가 기준을 세우고,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에 대해 회고하면서.


신혜지(@ssineji) | 마케터
좋아하는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알고싶은 것이 생기면 책을 읽고, 배운 것을 글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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