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계기는 사실 뚜렷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외근길에 느닷없이 만난 소낙비 덕분에 흠뻑 젖어, 홧김에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날 먹은 점심식사가 유독 맛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도시의 회색빛이 더 이상 참기 힘들 만큼 구역질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알베르 까뮈 - 이방인>의 '뫼르소'라도 된냥 '태양이 뜨거워서'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가져다 붙이자면 족히 스무 가지도 넘게 붙일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그렇다고 그중 무엇하나 나의 뚜렷한 계기나 동기가 되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언제부턴가 무엇인가가 몹시 역했고, 구역질이 났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최근 나는 그다지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어느 날 나는 정말 불현듯, 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서는 흰 봉투에 '사표' 혹은 '사직서'라고 적어 던지기도 하던데,
그렇게 까지 할 만한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까지 격정적이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절실하지도 않았다.
또한 나는 이 회사가 그렇게 까지 싫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 회사가 제법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나는 10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충동적이지도 즉흥적이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날 나는 몹시 '멍'했다.
그렇게 '멍'한 그날의 나는 사장실에 노크를 하고 사장실로 들어섰다.
이 건에 대해서 사장님과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은 아니다.
몇 해 전 언젠가는 말로써 다독이며 나를 독려하실 때도 있었고,
또 몇 해 전 어떤 날은 연봉이라는 물질적인 것으로 나를 회유하기도 하셨다.
아마도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말씀을 내게 하시며 나를 격려하시려 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사실 귀담아듣지 않아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향후 회사의 로드맵 따위를 내게 말씀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내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멍' 한 주제에 꺾이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가서 뭐 할 건데?"
이윽고, 단념하신 듯 사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냥 한동안... 올해까지는 쉬려고요"
대충 얼버무린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당시 나는 딱히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그렇게 사장님은 여러 거래처나 회사명을 내게 들이밀며,
소개해 주시겠다고 이직을 하라고 권유하셨지만,
그마저도 그저 좀 쉬고 싶다는 이유를 대며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사장님의 말씀은,
"고생했고 미안하다"였다.
'뭐가요?'라는 질문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삼켰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든 의문인데, 잘못말했다가는
마치 따지는 것 같은 뉘앙스로 전달될까 봐서,
무언으로 일갈하기로 하고는 사장실을 뒤돌아 나섰다.
그렇게 뒤돌아 나서는 내게 사장님은 다시 말씀을 이어 가셨다.
"바쁠 때 연락할 테니까 가끔 와서 도와줘야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푸하, 사장님은 10년씩이나, 아니 10년도 넘게 봤는데, 지겹지도 않으세요?"
"이제 나가는 마당에 그냥 형이라고 불러!!"
"괜찮습니다."
그렇게 사장실을 나와 동료 및 팀원들에게 전할까 했지만,
애당초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내 성격상 이러한 낌새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당장 나가는 것도 아니기에(이번 달 까지는 근무 하기로 하였다.)
일일이 찾아가 설명하는 것도 유난 떠는 것 같아 싫었고,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공지를 내는 것도 우스워서 그만뒀다.
'사장님이 알아서 전달하시겠지...'
그리고는 잠시 나가 가까운 내 친구들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전달했다
누군가는 이유를 묻기도, 퇴직금이 얼마냐 묻기도, 앞으로의 계획을 묻기도 했지만,
모두들 공통적으로 "축하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축하받을 일인가?'라고 생각하며 조금 의아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또한 순간 조금이나마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분명 나는 이 날을, 십여 년간의 세월을 하루 만에 끝내 버린 이 날의 결정을
후회를 할 것이고, 미련도 있을 것이다.
장작 십여 년간의 세월이다. 그런 것들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을 십여 년간의 마무리를
나 스스로 축하하려 한다.
그리고 무척이나 해보고 싶던 그 말을,
그 대사를 드디어 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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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는 이제 (곧) 자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