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퇴사를 결심하고, 또 퇴사를 공식화하고 나서는
한참을 바빴다. 이래저래 정리할 것도 많고, 매뉴얼 작업도 해야 했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됐든 나처럼 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발 내 빈자리가 다른 이에게 전혀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퇴사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대표님께서 나를 호출하셨다.
퇴사 전 한 번은 다시 이 퇴사건에 대해 실랑이를 벌이게 되리라고는
어렴풋이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현실로 다가오니,
예상은 했지만 서도, 썩 내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대면한 자리에서 대표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 내용인즉슨, 올해까지만 더 일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어차피 올해까지는 탱자탱자 놀 생각이었던 지라,
뭐 그리 어려운 제안은 아니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둥실둥실 저 푸른 가을 하늘을
떠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들떠 있는 내 마을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딱히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하기 싫다'정도 이려나?, 물론 뭐 언제는 일하고 싶어 일했나?...
"대표님, 제가 지금 하는 일 ㅇㅇ씨도 전부 다 할 줄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솔직히 나는 비록 퇴사하지만, 내가 오래 머물렀던 이곳이
오래오래 지속되고 번창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지금 이 제안은 거절하는 게 맞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10월, 연휴도 많아 그야말로 꽁으로 월급 타 먹기 좋긴 한데, 그 점은 좀 아쉽다)
그도 그럴 것이 예년의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결코 10월부터 12월,
지금부터 올해 끝날 때까지, 내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에 그다지 착오는 없다고 생각하며,
당연히 대표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번 더 권하는 대표님께 감사했고,
그럼에도 한번 더 거절하는 내가 야속하게 느껴지셨을지 모르겠다.
'음... 내가 너무 단호했나?'
나는 최대한 산뜻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하듯 조용히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이곳을 나가고 싶다.
여느 때와 마찬가치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제발 송별회니 회식이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무슨 일이든, 유난 떠는 것을 딱 질색한다.
그리고,
내가 늘 말하지만, 나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추석을 앞두고 있던 지난 10월 초의 날
결국 술에 절여진 채로 나는 10년간 머물렀던 이 회사를 뒤로 하고 나왔으나,
추석이 끝난 어제 바로 다시 회사, (전)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왜 출근 안 해?"
"푸하하, 이 농담하시려고 전화하셨어요?"
물론 내 업무에 궁금하신 사항이 있어서 겸사겸사 연락하셨다.
아마도 한동안은 이런 연락에 시달리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슬며시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