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예전부터 한 번은 꼭 해보고 싶고, 갖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던 그것은 바로 정장이다.
기성복이 아닌 맞춤 정장을 한 벌 갖고 싶었다.
물론 기성복보다 훨씬 고가인 것은 맞지만,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워서 여태 미루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시간을 다소 할애해야 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당시 내 업무 특성상 그다지 정장을 입지 않기에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귀찮은 나머지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며
미루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는 지금 또다시 미룬다면
다음 기회가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예전부터 조금은 관심도 있었고,
또 이전하던 일과는 접점이 조금은 있는 상황이라,
예전에 여러 미팅을 다니면서 받아놓았던 양장점의 명함이 있었다.
그렇게 명함을 보며 전화로 대략적인 견적을 잡고 예약을 했다.
생각보다 퇴사를 했음에도 나에게는 아직 좀처럼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일정이 유동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장점이다.
그렇게 예약날짜가 다가와 치수와 원단을 보러 양장점을 방문했다.
원단 스와치를 펼쳐 놓고 이런저런 설명을 내게 늘어놓았다.
조직의 짜임이 어쩌고, 감촉이 어쩌고, 신축성이 어쩌고...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한 달 여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내가 자주 떠들어대던 내용들이 내게 그대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비싸다고 꼭 좋은 원단은 아니에요."
절대 비웃은 건 아니다.
기시감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웃음 새어 나왔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뭐가 웃겨서 웃음이 나왔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원단을 선택하고 색상을 선택하고 치수를 이리저리 측정하고는
2주 후 최종 시착을 하고 최종 수정을 거쳐 대략 1달 남짓 걸린다며,
대략적인 앞으로의 일정을 내게 일러 주었다.
그렇게 시착 일정을 예약을 하고 양장점을 나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이 간단한 일을, 고작 한두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그동안
미루고 미뤘다는 것에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나는 뭐가 그렇게도 각박했던 걸까?
나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미루고 살아왔을 것이다.
내 삶 전체를 본다면 찬라일지도 모르는 이 쉬는 시간 동안,
그동안에 미뤄뒀던 것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시도라도 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