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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소년 Aug 28. 2024

9. 직선

 3코스(온평-표선)

 점심을 먹고 포구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정자에는 60대 중반의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부부가 말을 걸어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 도중 그들은 나를 자세히 보더니 어제 우도에서 봤던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우도 등대를 오를 때 영화 ‘더 랩스터’를 연상시켰던, 내가 사진까지 찍어줬던 분들이었다. 이렇게 만나니 반가웠다. 자신들은 대구에 살고, 올레를 위해 제주 한 달살이를 하고 있으며, 점심은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는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자신은 무릎에 심한 류머티즘이 있는데 남편 때문에 걷고 있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 나도 무릎이 안 좋은 상태라 그 불평에 공감이 갔다. 3코스는 두 개의 길이 있다. 3-A 코스는 산길이고, 3-B 코스는 해안 길이다. A 코스가 B 코스보다 대략 6Km 더 길다. 어느 쪽을 걷던 한 코스만 걸어도 완주로 인정해 준다. 3코스에서 남편은 A 코스를, 부인은 B 코스를 걷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선택인 듯했지만, 부인을 위해 해안 길을 같이 걷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나는 길을 나섰다.       

    

 조금 걸으니 돌로 된 첨성대 형태의 구조물이 보였다. 제주의 옛 등대인 도대다. 도는 입구를 나타내는 제주방언이고, 대는 돌을 쌓아 만든 시설물을 말한다. 포구가 끝나는 곳에 A 코스와 B 코스의 갈림길이 나온다. 나는 무릎 때문에 B 코스인 해안 길을 택했다. 계속 해안 도로를 걷고 있는데 기분이 싸했다. 올레 리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은 해안도로 하나뿐인데 이상했다. 되돌아갔다. 얼마 걸으니 길을 안내하는 간세의 일부가 보였다. 도로변에 건조를 위해 줄에 널린 한치들 뒤 쪽에서 간세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로 맞은편 식당에서 펼쳐놓은 한치들 때문에 보지 못하고, 해변으로 난 길의 입구를 지나친 것이다. 원래의 올레길로 들어섰다. 해변 길임에도 길의 주변은 초록으로 잔잔히 물들어 있었다. 이 길에는 용머리 동산이 있다고 한다. 용머리 형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왜 용머리인지 모르겠다. 작은 현무암들만이 길에 뿌려져 있다.     


<도대 / 간세를 못 보게 하는 방해물들>
<한치와 간세 / 용머리 동산>


.용머리 일뤠당’ 은 ‘달에서 가지 갈라다 모신 당으로 당신은 허물할망이라 한다제일은 택일하여 다니며 신목형석원형해변형의 당이다아기들이 괴롭다든지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찾는다이 당의 특징은 허물할망이 아기들의 부스럼피부병허물을 쓸어준다고 한다.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올 때 봤던 ‘용머리 일뤠당’ 안내판이다. 첫 문장은 말이 어렵다. 무슨 신당 같았는데 도로에서도, 해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용머리 동산의 끝에서 도로를 건너면 ‘연듸모루숲길’이 시작된다. ‘연듸’는 연대 즉 봉화대이고, ‘모루’는 언덕의 제주방언이다. 즉 ‘연듸모루’는 봉화대가 있는 언덕이다. 앞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환해장성’인 석성이, 뒤쪽에는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어, 이들로 적의 침입에 대응했을 것이다. 둘은 방어용 세트다. 그러나 숲길에서 봉화대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 적이 없으니 봉화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봉화대 쓰임이 사라진 만큼의 평화가 숲에 스며 길은 고적했다.          


<용머리 일뤠당 안내판 / 연듸모루숲길>

 짧은 ‘연듸모루숲길’을 끝으로 해안 길이 길게 이어진다. 환해장성은 온평에 이어 신산에서도 계속된다. 신산 환해장성이 끊어진 곳 근처에 바다로 난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에메랄드빛 바닷물을 가두고 있는 현무암 돌들로 만들어진 두 개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두 원형은 서로 이웃하고 있다. 에메랄드색은 항상 눈길을 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뜬금없이 프랙탈이 떠올랐다. 두 원형이 프랙탈에서 유명한 원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만델브로트 집합. 프랙탈은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구조를 가진 형태를 말한다. 끝없는 자기 반복적 구조를 가졌다. 프랙탈 구조에 대한 연상은 브누아 만델브로트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영국의 해안선을 조사했다. 여기서 축척 척도를 짧게 줄여가면, 해안선의 길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길게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75년에 그는 영국의 해안선과 같은 곡선을 프랙탈로 불렀다(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존 카스티/까치 참조). 이 해안선도 전체적으로 보면 프랙탈 구조일지 궁금하다.          


<만델브로트 집합(사진 : 네이버 지식백과 수학산책 참조) / 신산 전망대에서 본 해변>

 길은 ‘신산 포구’, ‘주어동 포구’, ‘신풍 포구’,‘신풍신천바다목장’, ‘배고픈 다리’을 지나 종점인 ‘표선 해수욕장’까지 계속된다. 배의 정박 때문인지 포구는 상대적으로 내륙 안쪽으로 조금 들어갔다. 반면 포구와 포구를 잇는 길은 둥글게 바다로 향했다. 이 형상대로 길은 내륙으로 살짝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육지는 바다를 행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거듭된 반복이 길을 예상 가능하게 했고 길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일까? 해안 길은 분명 곡선임에도 심리적으로 직선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직선의 길은 의외성이 없고 앞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직선의 느낌은 회사 직원과 여행했던 북해도의 어느 길을 생각나게 했다. 철새들이 드나든다는 어느 시골의 호수에 가려 했다. 여러 이유로 오전에 한 대뿐인 버스를 놓쳤다. 고민 끝에 그곳까지 걸어가기로 했다(무척 잘못된 결정이었다). 길은 직선이었고 끝이 보여,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직선의 끝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실점이 있었다. 지도를 보고 소실점 어딘가에 그 호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소실점을 보며 계속 걸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소실점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대로였다. 가면 사라지고 다시 저기에 그대로 있는 사막의 신기루 같았다. 우린 거의 3시간을 걸었다. 그래도 소실점은 멀리 그대로 있었다. 그때 오스트리아 건축가 훈더트바서가 했다는 ‘직선은 죄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당시 나에게 직선은 '죄악'이 아니라 '악’이었고, 그 악을 뼈저리게 느꼈다. 뭔가에 홀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에 갇혀 걷고 있다는 두려운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악은 우리를 호수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하고 입구에서 되돌아오게 했다. 호수 입구에 도착했을 때가 12시 40분이었고, 그곳에서 오후에 한 대뿐인 1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느꼈던 직선의 몸서리침을 약하지만 여기서도 받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형태의 반복이 그 직선의 느낌을 주었다.      


 신산 포구를 지나면 신산리 마을 카페가 있다. 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이다. 찍고 계속 걸었다. 주어동 포구, 신풍 포구를 지나면 신풍신천바다목장을 만난다. 반복에서 오는 직선의 느낌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천천히 걸어야 한다. 아니 들어가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다. 이곳의 풍경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몸이 그렇게 한다. 걷는 내내 풍광이 가슴속을 탁 트이게 한다. 이 시원함이 나를 기분 좋게 지워버린다. 길 위쪽으로는 초록의 목장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다. 바다 쪽으로 세 가지 색이 층위를 이루고 있다. 땅에는 클로버들의 초록, 바다의 짙은 파랑 그리고 하늘의 엷은 푸른색. 마크 로스코의 황금기 그림이 떠올랐다. 공간을 분할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보는 이와 소통하려는 색 덩어리들.      

     

 그 그림을 응시한다면 마치 음악이 그런 것처럼 당신은 그 색이 될 것이고전적으로 그 색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마크 로스코-     


 나는 바다 가까이 걸어가 세 가지 색의 풍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다를 응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파랑에 젖어보고 싶었다. 언제부터 파랑을 좋아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파랑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알고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blue에 우울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어사전에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파랑에 끌렸다. 영어사전이라니, 영어를 처음으로 배운 중학교 때부터 파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반에서 눈에 띄지 않은 조용하고 소심한 평범한 아이였지만 우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울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주로 읽고 좋아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본 헤세의 청소년 시절은 우울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좋은 작가가 된 헤세였기에 그에게 우울은 성장의 자양분이었고, 그래서 우울은 통과의례이고 멋진 훈장 같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엉터리 훈장에 끌려 그것이 스민 색이라는 이유만으로 파랑을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풋내기 시절의 치기 어린 감정에 끌린 파랑을 여전히 보고 있다. 지금은 파랑에서 우울이 증발하여 색과 색에 다가가는 끌림만 남았다. 조금 더 걸으니 초록의 끝에 두 개의 의자가 보였다. 하나는 하얀 우산을 쓰고 있다.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족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가 지나왔던 풍경 속으로 행복하게 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인간이 아닌 풍경, 자연이 된다. 이런 합일이 마크 로스코가 원했던 것일지 모른다.


<마크 로스코 그림 / 신풍신천바다목장>
<신풍신천바다목장>

 바다목장을 지나면 길은 도로가 아닌 해변으로 짧게 접어든다. 여기서 올레는 작게 구부러진다. 해풍에 나무들이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마치 육지로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이다. 이 형상을 보고 해풍의 위력을 실감했다. 얼마나 강해야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뻗으려 하는 나무의 욕망마저 좌절시킬 수 있을까? 해변에서 해안도로로 올라오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벽면에 있는 몇 개의 제주방언이 올레의 순례자를 반긴다. 큰 글씨로 제주방언을 쓰고 작은 글씨로 뜻을 썼다. 천천히 읽었다.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다. 계속 걸었다. 목이 말랐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보충한 물은 다 마셨다. 중간스탬프가 있던 마을카페를 카페로 생각했다. 커피도 마시고 물도 새로 담으려 했다. 그래서 스탬프를 찍으며 물을 다 마셨다. 그러나 마을카페는 카페가 아니었다. 칼국수 집이었다. 너무 당황하여 나왔다. 양해를 구하고 물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아쉬운 생각만 하고 그냥 걸었다. 카카오맵을 보니 신천올레해수풀장에 편의점이 있다. 2코스 대수산봉 이전에 있던 편의점 이후로 처음 보는 편의점이었다. 열심히 걸었다.      


<신산리 마을카페 / 해풍 맞은 나무들 / 제주방언벽>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그러자 뭔가 생각이 났다. 와펜. 올레는 각 코스의 종점스탬프 그림을 와펜으로 제작했다. 21코스에서 시작할 때 21코스 와펜만 샀다. 나머지는 각 코스에서 사려고 했다. 그런데 와펜은 공식스토어에서만 판매하고, 공식스토어는 모든 코스에 있지 않다. 지정된 몇 곳에만 있다. 지도를 보니 살 수 있는 곳은 3코스 종점에 있었다. 문 닫는 시간은 5시. 지금은 4시 10분. 와펜을 잊고 있던 것에 대한 후회가 통증처럼 밀려왔다. 편의점을 나오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배고픈 다리(고픈 배처럼 밑으로 쑥 꺼진 다리)'쯤부터는 뛰었다. 무릎은 걱정되지 않았다. 와펜을 구매하지 않으면 이번 올레는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다급히 들었다. 멀리 해수욕장이 보였다. 표선해수욕장이었다. 내륙으로 큰 호를 그린 해수욕장 둘레를 달렸다. 해수욕장이 끝나고 시내로 들어섰는데 어디가 종점인지 알 수 없었다. 간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달렸다. 달리다 이상 느낌이 들었다. 시내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세는 시내에 있다. 카카오맵을 보니 나는 4코스에 있었다. 해비치호텔 앤 리조트였다. 지나친 것이다. 너무 조급해서 간세를 못 본 것이다. 시간은 4시 50분. 고민했다. 다시 뛸지, 아니면 포기할지. 10분 안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맥이 풀려 피곤이 갑자기 밀려왔다. 몸은 너무 무거웠다. 순간 망설였지만 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못 살 수 있지만 그래도 뛰어보기로 했다. 카카오 맵을 보면 뛰었다. 보였다. CU 편의점 옆, 파란 컨테이너가. 정각 5시에 도착했다. 문은 반쯤 닫혀있고, 들어가니 직원은 퇴근하려고 가방을 메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와펜을 사려한다고 말했다. 직원은 내 몰골을 보더니 우선 물드시며 기다리라고 정수기를 가리켰다. 땀이 비 오듯 했다. 감사했다.          



<배고픈 다리 / 표선 해수욕장>
<3코스 종점 간세 / 표선 해수욕장>

 와펜도 사고 종점 스탬프도 찍었다. 표선해수욕장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내 몰골을 봤다. 엉망이었다. 그래도 와펜을 보니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렇게 급박하게 3코스와 이번 올레가 끝났다.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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