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처럼 Mar 14. 2024

엄마와 개구리

 열 살이었던 어느 봄날, 엄마 손을 잡고 강변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봄 내음 가득한 강변에서 엄마는 쑥을 캐고, 나는 개구리를 구경했다. 그날 개구리란 녀석을 처음 보았다. 마냥 신기해서 잡아 보려 했지만, 재빨리 도망을 가는 바람에 계속 놓쳤다. 개구리를 잡다 지쳐있던 순간, 쑥 색깔을 한 개구리가 내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며 천천히 녀석을 잡았다. 그리곤 엄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엄마, 다른 개구리는 전부 도망가는데 얘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 엄마도 이 개구리처럼 내 옆에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될까?”


엄마는 옅은 미소만 짓고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가출을 시작했다.

“얼굴 하얀 아저씨가 집에 찾아오면 무조건 돌아가라고 말해야 해”

누나와 형이 학교에 가기 전 낯선 아저씨가 오면 꼭 쫓아내라고 당부했던 날이 있었다. 반드시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철없는 꼬마였다. 낯선 아저씨가 집에 찾아와 내밀었던 과자 한 봉지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싫은 소리는커녕 과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저씨가 집에 다녀간 그날 이후 엄마는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엄마의 빈자리는 컸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나는 ‘동네 울보’가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땐 아침 9시만 되면 우는 아이였다. 아침 9시엔 방송 스피커에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잔잔한 음이 슬픔을 머금은 것 같아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럴 때면 담임 선생님이 무릎 위에 나를 앉히고 달래 주셨다.  

    

 학교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동네를 떠돌면서 울었다. 몇 시간만 참으면 누나와 형도 집에 올 텐데 그 잠깐이 힘들었다. 혼자 있는 게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다. 다행이었던 건 내가 울면 항상 곁을 지켜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텅 빈 집에서 울고 있으면 이웃에 사는 간호사 누나가 달래 주었다. 누나는 눈물을 닦으라며 휴지를, 라면을 끓여서 같이 먹자며 젓가락을 건넸다. 밖에서 혼자 거닐며 울고 있을 땐 동네 할아버지들이 달래 주었다. 단골 슈퍼 앞 평상에서 이야기 나누던 할아버지들은 울지 말라며 언제나 과자 한 봉지를 손에 쥐여 주셨다. 그럴 땐 과자의 달콤함이 눈물의 짠맛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예고 없이 비가 오던 하굣길. 그런 날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형형색색 우산을 든 엄마들이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은색 우산이어도 괜찮으니 엄마만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준비! 땅!'

야속하게 내리는 비를 뚫고 열심히 뛰었다. 더 뛰는 게 힘들어 천천히 걸을 때면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이 났다. 비가 아닌 눈물에 젖은 기분으로 길을 걸을 때면 항상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꼬마야, 어디까지 가니? 집까지 우산을 씌워 줄 테니 나랑 같이 가자"

"아…. 괜찮아요. 할머니."

"괜찮아. 이리 와"

"고맙습니다…."


낯선 할머니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걷던 빗길.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걸었기 때문일까. 그 순간은 할머니들의 마음속을 걷는 것처럼 언제나 따뜻했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던 엄마는 내가 열세 살 되던 해에 병을 얻어 하늘의 별이 되었다. 커다란 아픔만 주고 영원히 떠나 버린 엄마. 나는 꽤 오랫동안 혼란에 빠졌다. 그리움, 분노, 슬픔의 감정이 뒤섞여 균형을 잡지 못했다.     



 마흔세 살. 어느덧 나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가 되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니 영원할 것 같은 엄마를 향한 원망도 차츰 잦아들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 아빠와 살며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자식 셋을 건사해야 했던 엄마. 어른이 되어 팍팍한 현실을 겪어보니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레 ‘용서’라는 단어도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용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해의 마지막이 용서다. 난 이제 막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니까. 엄마 이야기로 막힘없이 글을 쓰게 되면 바로 그날이 엄마를 용서하는 순간일 거라 여긴 적도 있었다. 꾸역꾸역 어렵게 글을 쓰고 있으니 이 역시 아닌 듯하다.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이젠 엄마의 기억을 떠올려도 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득 어린 나를 달래 주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웃집 간호사 누나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과자와 우산을 건네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 마음이 헛헛하다.   

  

 얼마 전 엄마 산소를 찾았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려던 찰나, 봉분 위에 자라난 풀 사이에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 쫓아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 개구리처럼 말이다.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라는 질문에 엄마가 제야 답하는 걸까.


산속 풀냄새가 엄마와 함께 갔던 강변의 비릿한 냄새 같아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왠지 엄마를 따뜻하게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