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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앙 Jan 10. 2024

코피. 쿨렁이다

단편선

 일어나자마자 지각임을 직감했다. 평소보다 살짝 웃도는 기온에 평소보다 조용한 아침. ‘큰일 났다’는 감정은 ‘어쩔 수 없지’로 금세 옮겨갔다. 이렇게 된 거 욕 한 사발 먹더라도 천천히 나가자. 역시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찍혀있었지만 9시 30분 이후에는 멈춘 거 보니 회사 사람들도 지각임을 인지하고 깨우기를 포기했나 보다. 동기에게 전화를 걸자 역시 ‘늦잠 잤냐?’고 물었고 나는 ‘별일 없지?’로 응답했다. 상사 죄송하다는 카톡을 남기고 최대한 빨리 가겠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한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힘 있게 켜자 팔과 다리에서 으드득 뼈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매일 열 시간이 넘게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으니 팔다리가 불평할 만도 하지. 지금 시간 10시. 샤워하고 출근하면 11시 30분쯤 될 것이다. 그는 샤워를 하면서 지각사유를 생각했다. 몸이 아팠다고 할까, 차사고가 났다고 할까, 그냥 너희들이 너무 사람을 못살게 구니까 몇 날 며칠을 못 자다가 그만 기절해 버렸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고민하며 샴푸질을 하고 비누로 얼굴을 닦은 다음 답답한 코를 팽하고 시원하게 풀자 코딱지가 튀어나오며 코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코를 막아도 코피는 멈출 줄 몰랐고 피 묻은 와이셔츠를 두 벌이나 갈아입은 다음에야 겨우 출근길 차에 올라탔다. 그냥 코피가 계속 나서 늦었다고 하자.      


 예정보다 더 늦어버렸지만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서 안심이었다. 그의 회사는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서울 외곽이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마포대교로 빠져나온 다음 자유로를 타고 파주 출판단지로 향하며 창문을 열고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는 봄날씨에 흠뻑 취해 창밖을 바라보며 나만 빼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좋을 때다’ 부러워했다. 그 순간 과속방지턱에 차가 날았고 동시에 ‘헙’하는 신음과 함께 코피를 막던 휴지가 빠져버렸다. 과속방지턱은 높이 10cm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지만 운전면허 시험장처럼 방지턱이 5m 간격으로 물방울처럼 높고 봉긋하게 솟아있다. 서둘러 고개를 젖히고 손으로 코를 막아봤지만 피는 댐이 터진 것 마냥 흘러내려 와이셔츠 위에 뚝뚝 떨어졌다. 이후로도 차는 5m마다 한 번씩 들썩들썩하며 춤을 췄고 코피도 쿨럭 쿨럭하며 장단을 맞추어 손과 팔은 피범벅이 되었고 와이셔츠도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른 후 현장을 떠나는 어설픈 살인범의 행색으로 회사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예상보다 훨씬 늦어버려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서둘러 주차를 하다 코피가 묻은 핸들에 손이 미끄러지며 옆에 주차된 상사의 차량을 쾅하고 받아버렸다. 긴 한숨을 쉬고 그가 차에서 내렸다. 상사가 직장 생활 10년을 하며 아내의 눈을 피해 한 푼 두 푼 비상금을 어렵사리 모아 드디어 장만한 잘 빠진 세단은 원래의 위용을 잃고 헤드라이트가 박살 나고 조수석 문이 찌그러졌다.      


 인생의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던데,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건물 밖으로 마주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였을까. 망가진 자신의 차를 보며 분노의 삿대질을 하는 상사의 얼굴이, 아부떨기 좋아하는 동기들의 자동차 전문가로 빙의해 수리 견적을 내는 모습이,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직원이 코피를 뒤집어쓴 그를 보며 경멸하는 표정이, 사내 왕따였던 뚱뚱한 경리가 허둥지둥 달려와 물티슈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며 보내는 동질감의 눈빛이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후 왜 늦었냐는 상사의 질문에 그는 코피가 줄줄 났고 차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회사에 지각했고 이는 너희들이 나를 너무 못살게 굴어서 그런 것이라고 소리치려다가 관두었다. 그저 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았다고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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