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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07. 2024

우울은 아주 비참해

계절감은 언제나 나보다 속도가 빠르다.

잠깐 눈알을 굴렸을 뿐인데 어느새 밖은 겨울이었다.

부러 행복해지려고 열심히 사는 건 아니지만 틈틈이 삶 속의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살아왔던 나의 지난날.


지금은 복용하지 않고 있지만 2018년부터 약 오 년 동안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항우울성 약을 복용해 왔었다. 솔직히 정신과의 이미지가 그리 좋은 건 아니다. 진료 기록 때문에 보험을 드는데도 유병자로 제한이 생긴다. 또한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약을 복용하고 있는 배우자는 더더욱 원치 않을 리스크. 연애하면서 지금의 남편에게 병원에 다니며 약을 복용 중이라 밝혔을 때 주변에선 결혼반대도 있었다고 했었다.


미성년자였을 때는 병원 기록이 내 신상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선 인간관계에서 생긴 스트레스가 덧나 기존의 우울감이 더 심해졌고 공황장애도 앓으며 발작하기도 했기에 큰 결심 끝에 병원을 찾아갔던 때가 벌써 오 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몸이 아프면 의사 선생님에게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데 마음이 아픈 건 병원에 가기가 왜 그리도 망설여졌던 건지. 기어이 더 빨리 가지 않아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방치했던 게 후회되었다.


회사 근처의 병원을 찾아갔는데 첫 방문에 나는 어떤 방에 들어가 이십여 분간 설문조사처럼 검사지에 해당하는 것마다 체크를 했고 진료 첫날, 선생님은 검사지를 토대로 이십여분 상담한 끝에 내게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한 우울감을 앓고 있다고 말했었다.


기어이 인정해야만 했다. 속 안에서 곪아가는 상처를, 우울감을, 무력함을, 공포감을. 아, 우울은 비참하구나.


어딘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싶었다. 특히 밤이 되면 당장이라도 죽을 거 같은 공포감이 몰려와서 비명을 지르며 정신 못 차리고 울다가 진정하곤 했는데 생에 대해 큰 미련과 집착을 그리고 거창한 목표나 꿈이 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죽음이 두려웠다.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다. 관록조차 없고 삶의 본격적인 챕터에 들어가기 전인.


언젠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임에도 당시의 내겐 그 고통이 감당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냥 생각 못하게 지금 죽어버리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공황장애는 앓으면서 그 공포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피폐해져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아는 이들 모두가 내 건강을 걱정하고 나의 안부를 자주 살피곤 했었다.


밥맛이 없어 밥을 먹지 않다 보니 칠팔키로의 몸무게가 빠져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보였었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있었으며 나조차도 내가 이상한 상태라는 걸 여실히 느꼈었다.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판단으로 가게 된 병원.


이십 대 중반의 나는 너무나도 불안정한 상태였었다.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면 할수록 유독 내 목소리는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몇 달 뒤엔 이주에 한 번, 일 년 정도가 지난 후부턴 달에 한 번 병원을 찾아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했다.


상담실 내부는 연갈색의 밝은 우드톤이었고 의사 선생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아래쪽에서 은은한 간접조명이 켜져 있었고 짙은 초록색이 대형 캔버스를 가득 채운 단색 그림이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다 보면 책상 옆의 달력, 선생님 너머 등 뒤로 보이는 그림 그리고 열심히 태블릿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거나 태블릿을 들고 움직이는 손가락에 시선이 가곤 했다. 그곳에선 자연스레 이야기가 터져 나오곤 했다


괜찮다가도 괜찮지 못한 삶에서 나조차 나를 알 수 없었다. 우울감은 더 심해졌었고, 한 밤중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못 견디겠어서 스스로 목을 조르자,라는 생각에 자해를 한 적도 있었다. 겁은 많아서 조르다 말았지만 우울감과 함께 하는 몇 년 동안 나는 나에게 해를 가하는 가해자였다.


게다가 같이 찾아온 불면증은 매번 어딘가에 부딪혀서 생긴지도 모르는 멍자국처럼 일상이 되었다. 관계를 이어가는 게 지쳐서 집에 숨어있고 싶은 날도 있었다. 숨을 곳이 있단 건 참 다행이었다. 더 정확히는 침대 안 나의 이불속. 그 안에서 아침부터 웅크리고 이상할 정도로 감당 안되게 뛰는 심장의 숨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진정하면 오후였다.


일생상활이라는 게 때때로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 되어 태연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척 스스로를 속여야 하는 게 힘들었다. 미래를 꿈꾸고 싶지 않았다. 내일의 내가 어떨지, 다음 주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다음 달의 계획은 없었고 내년의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왜 태어난 걸까에 대한 고찰도 해보았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오싹한 상상과 그럼에도 죽음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혀서 그 상태로 졸도해 버릴 것 같은 공포함이 심장을 짓누르곤 했었다.


계절은 부쩍 빨리 다가왔고 나는 계절을 따라잡지 못했었다. 회사를 다니는데도 새벽 4-5시까지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지새우다 출근하기도 했고 수시로 반차를 써서 오전 내내 침대 속에 숨어 진정대지 못하고 미친 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숨을 쉬려고 애써왔다.


습관처럼 나오는 한숨은 토해지는 듯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꺼내졌고, 나는 내가 한숨을 그리 자주 내쉬고 있었다는 걸 타인의 말에 알 수 있었다. 태연한 척하면서도 안으로는 계속 곪아갔고 그런 와중에도 살아있기에 살아가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일 년여간 상담 끝에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진단서를 떼서 회사에 제출하고 한동안 오후출근만 하게 되었었다.


그때 알게 된 나의 진단서 속 병명은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라는 진단명. 타인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다시금 공황재발과 우울증 그리고 수면장애까지 주렁주렁 매달은 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예민하지 않게 살 순 없었으나 내가 날이 선 예민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유별난 일이었다.


어떤 계절엔 걸을 때마다 현기증처럼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득함에 기절이라도 하려나 싶었지만 우습게도 기절한 적은 없었다. 상담시간에 왜 그런 거냐는 물음에 스트레스가 응축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었다. 앉아서 대화를 하다가도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었다.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하게 올라오는 것도 같았었다.


이 년 정도가 지나자 차차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었고 그 상태로 한 달에 한 번 상담 횟수는 줄었고 불면증도 나아져 복용하는 알약 개수도 줄어들었다.


흔들리는 시기였던 걸까.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엉망이던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와 제법 재미있던 삶이지만 속은 곪아 아팠던 열심히 살아온 이십 대 중후반이 그렇게 지났다.


곁을 내어줄 수 있는 내 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삼십 대가 돼서 아기가 생기면서 어디서 모성애가 폭발한 건지임신 사실을 안 그날 결심했다. 더 이상 약을 복용하지 않기로. 그 결심은 출산한 지금도 나의 한 구석을 단단하게 붙잡아주고 있다.  


내게는 늘 적정량의 우울감이 존재하고 있다. 해서, 감정의 총량은 우울과 명량으로 나뉘어져 우울감이 심할수록 자기비판 그리고 삶에 대한 포기감이 커졌고 우울감이 적어질수록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제법 명량하게 살고 있는 지금 이따금 튀어나오는 우울은 더 이상 비참하고 가엾지 않다. 이 적정량의 우울감이 보다 성숙해진 나를 키워낸걸지도.


*해당 에세이는 과거 공황장애와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를 앓던 당시 작성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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