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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무와 열매.

by 부자형아

은채는 너무 아파 보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며 무통 주사도 맞지 않았던 사람이다.

자신이 아프고 힘든 것을 잘 표현하지 않는 그런 단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수호는 10년 동안 은채를 지켜봐 왔기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가게 일을 하면서 너무 무리한 것인지, 오고 가며 코로나에 걸린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수호는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어린이집을 들러 나혜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그냥 감기라고 꿋꿋이 우기던 은채는 승원이를 안고 누워있었다.

누워있었다기보다 쓰러져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마스크까지 쓰고 아이를 재우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해졌다.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주일 동안 주방 일하랴, 손님 응대하랴, 새벽에 아이들 케어까지...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아이들도 사랑하지만,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한다.

아이는 열매이고, 아내는 나무다.

나무가 있고 열매가 있지, 나무 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아이 엄마이기 이전에, 한 남자의 아내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 사랑받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아내가 불행해지거나 힘들어한다면 나무가 병들기 시작한다.

나무가 건강해야 그 나무 안에서 열매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수호는 은채와 부부가 되고 나서 가수 션이 말한 이 글귀를 하루도 잊고 산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나무가 아프고 힘들어한다.

나무가 아픈 걸 모르는지 열매들은 해맑게 웃고 있다.


열매들이 아플까 봐 걱정하는 은채를 일으켜 세우고, 왼손에는 나혜 손을, 오른손에는 승원이를 안았다.

수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빨리 병원으로 달려갔고, 가족 모두가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5살 나혜는 처음 받는 코로나 검사에 깜짝 놀라 자지러지게 울었고 코피까지 흘렸다.

2살 승원이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검사에 대성통곡하다가 금세 다시 잠이 들었다.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은채만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라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한 두 줄의 양성반응이 나왔다.

간호사도 이렇게 빨리 진하게 결과가 나온 적은 처음이라고 한다.

의사는 아마 가족들 전체가 걸릴 확률이 높다며 엄마는 자택에서 무조건 자가격리를 해야 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웬만하면 나가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집에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호는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은채가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라 아이 둘을 케어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수호와 은채는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장인어른 댁으로 가는 방법뿐.

결국 은채는 집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아이들과 수호는 짐을 꾸려 장인어른 댁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기로 하였다.

혹시나 잠복해 있던 바이러스가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전염될까 봐 마지막까지 고민하였지만, 본인들은 백신을 4차까지 다 맞았으니 괜찮다며 빨리 오라고 하신다.

염치가 없었지만, 방법도 없었다.


장인어른 댁에서 오전 2시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도매시장으로 출발했다.

오전 3시부터 9시까지 반찬을 만들어 놓고, 홀 직원의 출근과 동시에 밖으로 나온다.

은채가 좋아하는 순댓국을 포장해서 집 문 앞에 두고는 문자를 보낸다.


‘문 앞에 밥 사다 놨으니까 힘들어도 먹어. 약도 잘 챙겨 먹고 푹 쉬고 있어.’


혹시나 몰라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잘못하면 장인어른, 장모님, 딸내미, 아들내미까지 줄줄이 옮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장인어른 댁으로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수호.

3일 동안은 코로나 검사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애들이나 수호가 코로나에 확진되면 완전 비상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들과 수호는 그 뒤로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아이들 점심을 먹인 뒤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면 다시 가게로 향한다.

홀 직원과 4시에 교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저녁을 자주 먹지는 않지만 힘들거나 배가 정말 고플 때는 가끔 먹곤 한다.

햇반을 데우는 동안 내일 팔지 못하는 반찬 중 가장 많이 남은 것 위주로 골라온다.

조리대 구석탱이에 햇반과 반찬을 올려두고 빨간 플라스틱 의자 4개를 포개어 앉는다.

혹시라도 손님이 들어올까 봐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최대한 안 보이게 먹는다.

미어캣이 따로 없다.

이렇게 먹고 있으면 정말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수호였다.


‘내가 이러려고 자영업을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코로나 시국에 매장 내에서 취식하는 몰상식한 가게’ 라는 글이 최근 맘 카페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 뒤로 웬만하면 매장 내에서 잘 먹지 않는다.

직원들도 수호가 매장을 볼 테니 나가서 사 먹고 오라고 한다.

맘 카페에 소문 한번 잘못 나면 망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소문이 얼마나 빠르고, 풍선처럼 부푸는지...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얼마 전 오픈한 옆집 밀키트 가게도 맘 카페에서 맛이 없다는 글이 달리면서 사장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 9시.

매장 문을 닫고 아이들을 만나러 장인어른 댁으로 간다.

도착하면 승원이는 아직 어려서 할아버지 손에 곧잘 잠이 들어 있었고, 나혜는 항상 엄마 품에서 자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하곤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오자마자 아이들을 재우는 것이 우선이라 같이 눕는 수호다.


엄마가 아픈 것을 아는지, 나혜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드는 척하더니 이내 뒤돌아 눕는다.

자는 줄 알았던 딸내미 쪽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히 옆에서 바라보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말은 못 하지만 엄마가 내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호는 자장가를 틀어주며 등을 토닥토닥 해준다.

어리지만 이럴 때 보면 참 기특하다.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일어나 씻는다.

하루 종일 반찬을 하고 나면 온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씻고 나와 장부를 정리하고 나면 어느덧 11시.

오늘은 2시에 일어나 시장을 갔다왔으니, 내일은 3시에 일어나도 된다.

고작 1시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눈을 붙인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다행히 은채는 기력을 되찾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은채가 코로나로 아팠던 일주일이 수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다.

그래도 본인보다 가족들이 더 걱정되는 수호였다.


‘앞으로 우리 나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열매들도 마찬가지!’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수호에게도 봄날이 오길 바랐지만...

역시나 하늘은 여전히 수호편이 아니란 말인가.

마트에 심부름 보냈던 홀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이야기한다.


“사장님!! 여기 마트에 반찬가게 생긴데요. 사람 모집한다고 현수막 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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