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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비범 Apr 05. 2024

내 하루를 통째로 망칠 수 있는 사람

오늘 분명 기분 좋았거든요

정말 많은 날들이 그랬다.

햇살도 좋았고, 학교 친구들과 이상한 말들을 계속하며 웃고, 수업이 끝나면 간단히 맥주도 한잔하고 기숙사로 들가는 길에 맞는 바람마저 너무 좋아서 행복하다고 느낀 날에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는 또 무언가에 화가 잔뜩 났다. 냅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내가 주변이 시끄러우면 내가 즐겁게 있는 것에 화가 난 건지, 자기 얘길 들을 자세가 안 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화가 난 건지 또 부가적인 화로 그 전화를 시작한다. 보통은 아빠와의 갈등이고 혹은 누군가 자기를 화나게 했는데 그게 분이 안 풀려 나한테 토로하고 싶어서이다. 

그럼 내 기분은 어떨까? 오랫동안 엄마와 나는 상하관계였기에 화가 나기보단 무섭다. 혈관에 차가운 바람이 들어 온몸을 차갑게 만들어 옴싹달싹도 못하게 만든다. 전화를 계속 들어주다 보면 엄마의 기분이 차차 나아진다. 그럼 나도 무서움이 가신다. 무사히 전화를 끊으면 나는 전화 전의 좋은 하루들은 꿈이었고 다시 현실로 끌려 내려와 바닥에 딱히 박힌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건 좋은 경우다. 안 좋을 때는 내가 그리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와의 갈등으로 마무리된다. 그럼 나는 또 며칠을 무서워하고 눈치 보고 잘 모르겠는 내 잘못을 뒤지고 뒤져서 사과해야 한다.

엄마의 기분이 좋은 날에 말해본다. 

-엄마가 기분이 안 좋아서 전화가 오면 나는 갑자기 무서워.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내자나. 

엄마의 기분이 좋은 경우라면, 언제 화를 냈냐고 좀 격양된 목소리를 구분 못하냐고 한다. 하지만 기분이 안 좋으면 나보고 기억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상상에 빠져있다고 한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가스라이팅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걸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우리 엄마를 데려다줄 것이다. 이 단어가 갑작스럽게 대중적으로 변할 때 나는 이해하려고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명확한 예시가 바로 옆에 있는데.


<한 발짝 내딛기>

나는 이 상황의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과, 그 상황에 빠진 나를 분리해서 엄마가 말하는 동안 그 말의 줄거리만 파악하고 감정들은 받아내지 않고 나 자체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아 그런 줄거리라서 엄마가 화가 났구나? 그랬구나

하고 나는 오늘 집에 가면 어떤 영상을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할지. 어떤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할지 이악물고 생각했다. 엄마의 감정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나의 태도 불손으로 엄마가 화가 더 나는 날엔  그냥 만들어놓은 말들로 미안하다고 하고 상황이 끝이 나면 상화에 빠진 나를 바로 내던져 버리고 나라는 사람을 지키려 했다. 

그렇게 또 3년이 지났다. 이 습관을 들여서인지 지금도 주변 중에 자기 말을 늘어뜨려 놓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듣는 나와 온전한 나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말하려는 요지만 파악하고 나머지 나한테서 올라오는 감정이나 전해지는 감정을 쳐내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유에서 만든 습관이건, 이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게 했다.


근본적으로 해결을 위해서는 엄마와의 상하관계를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이 주제는 차차 쪼개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의 경우에서 가장 주축이 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나를 우선시 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속상해서 어딘가에 토로하고 싶다고 하여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그걸 맞아 줄순 없다. 내가 온전히 이 사람을 받아줄 수 있을 때나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나 또한 그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돌까지 맞아 울게 되더라. 

엄마와 같이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장은 혼자 두어야 한다. 엄마가 오는 전화에 내가 상황이 준비되지 않으면 받지 않는다. 급한 일이면 다시 전화가 올 것이니. 내가 준비가 되면 엄마는 화가 많이 가라앉아 자신의 상황을 좀 더 이성적으로 묘사하고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엄마가 기분이 안 좋을지언정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 있으면 침묵으로 답했다. 잠깐의 침묵은 그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보통 그런 경우 자존심 센 우리 엄마는 다른 말을 돌리거나 어떤 경우엔 방금 말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어떤 일에서든 당신의 감정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맹목적인 감정과 사랑은 결국 말라 볼품없이 징그러워지기까지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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