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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5. 2024

브로커 한 씨

  배추 수확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느닷없이 여름이 다가온 것처럼 햇볕이 유난히 따가워진 오후, 일을 마친 한 씨가 차를 몰고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왔다. 그녀는 마당에 나와 있는 나를 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일 마치고 오시는 길인가 봐요.


  네, 이제 좀 쉬어야죠. 이골이 날 법도 한데 낮에는 아무래도 깊게 잠이 들지 않아요. 몸은 노곤한데, 잠은 안 오고…….


  짙어진 눈그늘만큼 한 씨의 몸도 무거워 보였다. 나는 장에 나갔다가 사 온 꽃모종을 심기 위해 호미로 담 모퉁이를 파고 있었다. 한 씨가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가문비나무 아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에 앉는 모습이 빳빳한 대나무 마디를 억지로 꺾는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무릎이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병원에서 수술을 권하는데 벌써 수술해 버리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더 힘들어질까 봐 버티고 있는 거예요. 무릎 수술은 보통 70세 이후에 해야 해요. 인공 관절 수명이 그리 오래 가지 못 하거든.


  음, 그렇군요.


  모종을 심으려고 몸을 돌린 나의 등 뒤에서 한 씨가 이야기했다. 그 바람에 나는 다시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첫째 딸이 광주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근데 일만 고되지, 월급을 쥐꼬리만 해서, 그 돈으로 어떻게 사나 싶더라고요. 월급 받아서 집사고 차 사려면 늙어 죽겠더라고요. 결국 우리가 집도 구해주고 차도 뽑아줬어요. 아들도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엘지에 다녀요.


  거긴 연봉이 꽤 될 텐데요.


  아이고, 나는 대기업이라고 해서 월급이 셀 줄 알았지. 형편없더라고요. 우리는 대학 나오고 대기업 들어가면 좀 다를 줄 알았지. 세금 떼이고 어쩌고, 월급쟁이로는 못 살겠다 싶더라니까요.


  대기업 월급이 적다면 도대체 얼마나 벌어야…….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면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대학 나오고 어렵게 입사 시험 봐서 들어가 봐야 못 배운 우리보다 벌이가 못 한걸요. 우리 일 만한 벌이가 어디 있으려고……. 이런 일 하다 보니 화물차 알선해주는 일도 하면 되겠다 싶어서 해남에 땅을 사서 사무실을 차려놓고 겸업을 하고 있죠. 그러니 연간 벌어들이는 수입이 월급쟁이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거예요. 돈맛을 아니까 무릎을 절룩거리면서도 일을 다니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애들은 일 그만하고 몸 관리나 하면서 살라고 그러죠. 이제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돈을 손에 쥐면 그게 안 되거든. 여윳돈이 생기면 경매해서 땅도 사들이고……. 거, 얼마 전엔 나주에 있는 배밭 몇천 평을 경매로 받았어요. 요즘은 농사를 직접 지어야 하는 규정이 있어서 시간만 나면 배밭 관리해야 하니까 좀 귀찮게 되었죠. 근데 과수 농사도 재밌는 게, 태풍피해 신고할 때 낙과 사진을 찍어서 보고를 하게 되어 있어요. 어차피 속아줘야 할 배를 잘라서 태풍피해로 떨어진 것처럼 사진으로 찍어 보고하면 태풍피해 보상금이 많이 나와서 그게 또 쏠쏠하더라고요.


  한 씨가 하는 모든 일이 불법이었다. 그녀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세상 물정도 모르는 바보인가 살짝 의심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그날의 대화가 한 씨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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