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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2. 2024

흉작

  불어 터진 라면을 개수대로 부어내고 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준표가 냉커피를 만들어 두었다. 우리는 냉커피를 들고 계곡을 타고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층층나무의 해먹에 앉았다. 요람인 양 해먹에 온몸을 파묻은 준표는 머릿속 어딘가에 알처럼 박혀 있는 지난해 봄배추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 배추 농사 말아먹은 거 너 알지.


  지난해 거래처 사장이 우리 숙소에 머물렀잖아. 보름치 숙박료 계산했다가, 서둘러 방을 뺀다는 바람에 일수 계산해서 환불해 줬었지. 배추가 안 좋게 되어서 수확할 수 없다고 그러면서. 그분 말로는 수억 원 피해를 봤다던데…….


  그렇지, 알고 보니 그게 다 육묘장에서 모종을 잘못 주는 바람에 생긴 피해였던 거야. 육묘장에선 배 째라는 식이더라고. 참 나, 그 새끼들 전부 도둑놈 새끼들이야. 하루 이틀 거래하던 사이도 아닌데, 자기들도 모르고 줬다고, 자기들도 피해자라고 막 핏대를 세우는데, 상종을 못 하겠더라고. 배추가 알이 차기 전에 꽃대가 생기기에 이게 무슨 이변인가 했었지. 밭떼기로 거래한 사장은 배추 하나도 못 건지고 거래금만 물어줬잖아. 육묘장에서 준 모종이 기존에 거래하던 거랑 다른 거였데.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추대가 우후죽순처럼 올라오길래 기후 때문에 그런지 알았지. 그 새끼들 돈을 처먹었는지, 신품종이라고 몰래 들여와선 모른 척 우리 농가에 뿌린 거야.


  야아, 그런 건 고발해야 하는 거 아니냐? 혼자 힘들면 작목반이 단체로 대항하던가.


  법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어도 책임 소재를 밝혀내기가 어렵데. 증거도 남아 있지 않고. 결국 거래처 사장이나 배추밭주인들이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거야. 지역에 따라서는 밭떼기로 계약하면 결과물이 어떻든 백 퍼센트 지불해야 하는 곳도 있지. 그런 경우는 정말 죽고 싶을 거다. 가장 손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결국 밭떼기 거래를 한 사장이라고 볼 수 있지. 이런 사장들은 한 지역에 2만 평 넘게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지역에 농사를 망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밭주인도 배추가 온전히 수확만 되면 거래 금액을 모두 받을 수 있지만 수확을 못 하는 경우는 사장에게 오십 퍼센트밖에 못 받게 되니 손해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배추 수확이 정상적으로 잘 이루어져야 서리태콩을 심을 수 있는데, 농민들도 이중으로 손해를 보는 거지. 배추밭은 비닐이 멀칭이 되어 있어서 바로 그 자리에 서리태콩 모종을 심게 되어 있잖아. 가을 벼수확이 끝날 무렵에 수확하면 그게 고스란히 순수익으로 남게 되는데……. 이런 경우 인부 사서 콩 심어 봤자 가을에 수확하고도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면 그냥 밭 갈아엎고, 콩 농사 안 지으면 안 돼?


  멀쩡히 있는 땅을 놀리면 그게 농부겠니. 비닐 멀칭이 되어 있는 배추밭은 망친 자리를 갈아엎지도 못해. 결국 밭주인이 인부를 대든 어떻게 해서든 배추 작업을 끝내야 하는 거야. 배추 농사나 서리태콩 농사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수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가을이 되면 외지에서 콩 수확 팀들이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에 콩 수확 팀들이 묵는 때도 있어, 사실 농부들이 서리태콩 농사를 포기하게 되면 숙소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 마을의 경우, 배추 수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모든 비용이 상쇄되고, 가을에 수확한 서리태콩의 수입이 밭주인의 순수익으로 잡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흉작을 당한 거래처 사장은 올해 우리 마을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왔다면 분명 우리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준표는 머릿속에 알처럼 박혀 있는 지난해의 기억을 한동안 퍼 올리며 한숨처럼 뱉어낼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의 한숨을 몇 번이고 받아줄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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