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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7. 2024

한 씨가 사라진 날

  다음날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한 씨와 그의 일행들은 이미 어디론가 가버린 뒤였다. 배추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것 같아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급하게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준표가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왔을 때, 한 씨와 그의 일행들이 단속반을 피해 먼저 자리를 뜬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지금 경찰서에서 오는 길이야.


  준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경찰서는 왜? 무슨 일인데?.


  경찰이랑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이 어젯밤 우리 동네를 덮쳤지 뭐야. 와, 근데 하필 우리 밭에서도 불법 체류자들이 잡힌 거야. 그래서 오후에 경찰서 전화 받고 조사받고 나왔잖아.


  너는 무사한 거지?


  나야 뭐 불법 체류자들이랑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확인만 하고 나왔지. 밭떼기로 거래한 사장들이 곤란해지겠지. 실질적으로 인력 관리하는 작업반장들은 따로 있으니……. 상황이 참 복잡하겠더라.


  그래서 한 씨랑 갑자기 사라진 거구나!


  한 씨랑 김 씨랑 싹 다 도망갔지?


  음, 아침에 방문이 여기저기 열려있길래 가봤더니 짐을 다 뺐더라고. 밤새 그 난리가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근데 김 씨 방에 가방 하나가 남아 있지 뭐야.


  야, 그거 투이 가방 아니냐? 배추밭에서 붙잡힌 사람들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투이도 있더라고. 참 나,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 잔뜩 겁에 질려서 울고 있는데,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고……. 사람들을 서너 명씩 묶어서 쇠고랑을 채워놓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해놨더라고. 사람을 줄줄이 엮어서 쇠고랑을 채운다는 게 말이 되냐. 더군다나 여자들이 수갑 차고 어딜 도망갈 거라고, 무슨 강력 범죄집단도 아니고…….


  김 씨 그 인간도 참……, 인간이 어쩜 그러냐. 근데 한 씨 말이 붙잡힌 사람들 전원 추방한다고 하던데, 이 가방은 어쩌면 좋냐.


  그냥 버려야지 별수 있냐.

    

  나는 문득 한 씨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를 테이블 위에 걸쳐놓고선 불법 체류자에 대해 늘어놓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의 기이한 자세 때문에 묘하게 신경 쓰며 듣던 그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들도 한국서 오래 일하더니 인건비 담합을 하는 거예요. 그 바람에 인건비가 너무 올라버린 거죠. 정부에서도 물갈이가 한번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올 상반기까지 외국인 노동자 2만 명 잡아들인다고 하잖아요. 곧 단속반들 대대적인 토끼몰이가 있을 거예요. 돌려보내고 다시 들어와야 만 인건비를 조절할 수 있다 이거죠. 그래야 농민도 살 수 있고, 사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한 씨의 말처럼 정부 기관의 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외국인노동자의 임금 조절을 의도한 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결말을 알고도 모른 척 묵인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정부나 한 씨나 불법 체류자들을 이용 수단으로 여기는 측면에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투이의 가방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어쩐지 필요할 때 쓰고 불편해지면 버려지는 불법 체류자들을 보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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