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머리 아픈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냥 이것저것 눈에 뵈는 게 많아지니 그런 거지 뭐.
신경은 쓰이지만 굳이 길게 생각 안 하려고 한다.
생각하면 뿅! 하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 굳이 나를 갉아먹을 필요가 없다.
(온 우주가 날 도와주고 있다아아아아. 되뇐다.)
요즘 그림을 그리며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붓을 들고 집중을 하면 잡념이 없어진다.
민화 선생님은 그림은 정신수양이라고 말씀하기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감정이 요동칠 때 더 세심한 작업을 하면 좋더라.
붓을 꼿꼿이 세워 조금만 흐트러져도 바로 티가 나는 선작업을 한 10분만 해도 마음이 엄청 안정된다.
덕분에 손이 빨라지는 건 덤이다.
(손이 빨라진다고 좋아했는데 속도와 세심함은 또 반비례여. 왜그러는겨.)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한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책 속에 퐁당 빠져 머릿속에서 3D로 몰입을 해버리니 안 보고 베길 수 있나.
아 만화방도 가야 하는데.
아 등산도 가야 하는데.
가을이 지나가기 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아직도 감기 기운이 있다 보니 몸이 아프면 머리도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것 같다.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자꾸 도돌이표 물음이 내 속을 시끄럽게 하길래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붓을 잡았다.
책을 읽을까 하다가 그리다가 남긴 부분이 보여 붓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있는 그림은 벽에 붙여둔다. 오며 가며 계속 봐야 아 이거 해야지! 마음이 송송송 생긴다.)
오늘은 자신 없는 이파리 부분 색칠이다.
꽃은 이제 감이 잡히는데 이파리는 하이후.
모르거써.
선생님은 화분 하나 사서 잘 관찰하며 드로잉 해보면 된다는데 드로잉 해봤다가 응? 응? 어?
물음표가 더 생겼다.
그래서 오늘 뇌에게 명령한다.
이파리를 잘 칠할 수 있게 생각을 해보도록.
우리 뇌는 자꾸 해결할 거리를 줘야 많이 움직인다.
계속 혼잣말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고민해 본다.
해가 이렇게 온다 치면 여기에 그늘이 생기려나.
여기는 밝은 부분이고 저기는 살짝만 밝으려나.
에잇 뭐 그까이꺼. 안되면 망치는거여.
두 개는 망쳤다.
보통 망친 게 아녀. 그늘이 네 맘대로 내맘대로네 거참.
세 번째는 그래도 두 개보다 나았고 네 번째는 뭔가 애매한데 그래도 세 개보다 나은 것 같다.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버렸다.
분명 점심경에 시작했는데.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다가 고양이가 밥 달라고 옆에 와 울어서 알게 되었다.
고양이 밥을 주고 나니 나도 허기가 져 얼른 한 그릇 뚝딱 저녁을 먹었다.
아까 머리 아픈 얘기들은 온데간데없이 꽃그림 네 개가 나란히 벽에 붙어있다.
허허 멀리서 보면 꽤나 그럴싸한걸.
아니 어떻게 민화 배우고 싶다 생각하니 집 근처 주민센터에서 민화를 가르치고,
민화 선생님은 개인전도 하신 걸출한 실력자이신데다가,
세상에 같은 반 분들은 왜 이리 다 따습고.
(동숲 느낌의 사람들이다. 처음에 우리는 가족 같은 분위기예요 라고 해서 살짝 흠칫했는데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다. 서로 칭찬만 해 쏘스윗 따숩.)
이 민화는 나의 복잡한 머리를 한 번에 싹 물청소해버리는 기특한 친구이니.
이야 온 우주가 날 정말 도와주고 있다아아아아!
감사해버리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