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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연필집착증

by 구름이 Jan 05. 2025

“엄마, 나는 돌잔치 때 뭐 집었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연필을 잡던데.”

“돌잡이 상 위에 뭐가 올려져 있었는데?”

“연필, 청진기, 지폐, 의사봉, 마이크, 뭐 그런 것들이야.”

“나는 왜 연필을 잡았을까?”

“글쎄. 아마 제일 익숙한 게 연필이었나보지. 어릴 땐 연필을 빨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탑도 쌓고, 굴리기 놀이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기도 했으니까.”

     

그날 대화를 듣던 나는 호기심이 꿈틀댔다. 나의 연필 집착증은 이렇게 시작된 것 같다. 연필이 그렇게 재미있는 놀잇감이라면 어느 앵무새가 이를 마다하겠는가? 누나 인간이 연필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제 내가 직접 체험해볼 것이다. 나는 호기심 마왕, 모란앵무니까.     


다행히 우리 집은 연필 천국이다. 책상과 책장, 식탁 위에도 연필이 굴러다닌다. 엄마 인간이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을 때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부리로 슬쩍 건드려 보았다. 혀를 살짝 내밀어 맛도 보았다. 촉감과 맛은 내가 좋아하는 횃대의 재질인 나무와 닮아 있었다. 나무를 부리로 쪼는 건 나의 전문 분야이다. 나는 열심히 부리로 나무를 탐색하였다. 연필 껍질이 조금씩 벗겨져 나왔다. 부스러기 나무 조각들이 책사 위에 작은 구릉을 만들었다.      


한때 유행했던 자기계발서 중에 ‘몰입’을 키워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다. 몰입은 주로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을 자극하여 집중력과 창의력을 극대화한다. 몰입 상태에서 전두엽이 활성화되면 불필요한 정보는 억제되고 필요한 작업에만 에너지가 집중된다. 하지만 나는 굳이 몰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선천적으로 한번 재미에 빠지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붕어빵을 야금야금 먹다 보면 어느새 단팥이 정체를 드러내고, 단맛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계속 붕어빵을 찾게 된다. 연필의 나무를 계속 부리로 쪼다 보니 그 나무 안에 검은 단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와는 다른 묘한 맛이었다. 그 매력에 이끌려 나는 계속 그 검은 단팥을 먹고 있었다.      


“야, 구름이! 연필심까지 그렇게 먹으면 어떻게 해!”

엄마 인간이 크게 호통을 친다. 

나는 깜짝 놀라 푸드덕 날아 올라 방문 꼭대기로 도망쳤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나 인간이 놀라서 달려 왔다.

“엄마, 구름이 부리가 왜 까만색이야?”

“구름이가 연필을 쪼다가 연필심까지 분리해서 그걸 먹었어.”

“아, 불쌍한 녀석. 배가 고팠나?”

누나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고통받는 아이를 보듯 나를 측은하게 쳐다보았다. 나의 취미 생활을 전혀 모르고,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일차원적인 앵무새로 보고 있다.     

그리고... 뿌지직. 갑자기 똥이 나와 버렸다. 방문 위로 도망칠 때 너무 놀랐나보다. 

“으이, 구름이 똥이 까매!”

“응. 그 녀석 흑연을 먹어서 그래. 빨리 씻어줘야겠다.”     


분위기가 좀 진정되고 누나가 방으로 돌아간 뒤, 나는 다시 작업하던 연필로 다가갔다. 엄마 인간은 일을 하느라 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녀석, 잡았다!”

“삑~ 삑~”

아, 함정일 줄이야. 엄마 인간은 내가 내려올 때까지 단청을 부리며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구름아, 부리 좀 씻자.”

엄마 인간은 수돗물을 틀어 내 부리를 닦기 시작했다. 

“자, 입도 벌려 봐. 이것 봐라. 혀도 까맣잖아. 어디 태백 탄광에서 석탄 캐고 오셨어요?”

엄마 인간은 내 부리와 혓바닥까지 싹싹 씻어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강제 샤워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나는 연필에 몰입하다가 부리가 까매지고, 엄마 인간은 나를 화장실로 끌고 가 강제로 샤워를 시키고.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인간은 흑연을 뺀 연필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열심히 연필을 갉아 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검은 단팥은 나오지 않았다. 단팥이 빠진 붕어빵을 붕어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연필에 흥미를 잃고 부지런히 다른 연필을 찾아 헤맸다. 엄마 인간은 연필심 위에 캡을 씌워 버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오히려 플라스틱 캡이라는 방해물은 나의 의지를 더 불타오르게 했다. 삶에서 마추치는 고난은 내가 성공하기를 기다리는 메신저 같은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인간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플라스틱 캡을 열심히 벗겨내고 다시 연필에 매달렸다. 

     

어느 날 나와 같이 놀아주던 아빠 인간이 놀라서 엄마 인간에게 달려 갔다. 

“구름이 똥이 초록색이야. 무슨 병이라도 난 거 아니야?”

엄마 인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니야. 아까 초록색 색연필 갉아 먹어서 그래. 또 씻겨야 되겠군. 슈렉, 이리 와!”

나는 연필광이다. 한 겹씩 벗겨 낼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무의 향기와 그 안에 단팥과 같은 연필심의 맛을 음미하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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