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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네가 아닌 다른 사람

by 파랑 Dec 0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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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같이 일상을 지내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나에게 누군가 굴러 들어왔다. 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이 친구는 뭔가 다른 친구들과는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껍데기뿐인 내 모습도 꽤나 괜찮은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친구였다. 착했다. 질투가 많은 네가 질투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참 열심히 했다. 내 앞에서는 욕을 하지 마라는 나의 말에 정말로 한 번도 욕을 하지 않고 공주라고 부르라고 장난치는 내 말에 공주라고 진짜 불러주는 그 친구가 나는 너무 궁금했다. 아무 불평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같이 함께 해주는 그 친구에 대한 얘기를 너에게 계속해서 끄적였다. 방학이 되어도 나는 여름실습을 신청해 학교를 다니며 시험준비를 했다. 시험 전 날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친구의 질문에 보라색이라고 답을 했었다. 필기시험을 치고 망쳐버려 기운이 없는 나를 만나 수고했다며 보라색 꽃다발을 건네는 그 친구의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좋았다. 좋기도 잠시 그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고 나서의 일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그 친구의 확실한 마음이 궁금해 떠보고자 한 말이 “너 혹시 나 좋아해?”라는 말이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은데?”라며 역 질문을 하며 장난치는 그 아이를 보며 너와 같지는 않지만 한 편으로는 비슷한 거 같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했다. 일기장을 펼치고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냐고 괜찮은 애인 거 같냐고 네게 물었다. 답장이 없는 너인걸 알기에 네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커지는 게  겁이 나는 건 네가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내게 고백을 할 거라며 날짜를 알려주는 그 아이가 귀여워 보였다. 도대체 누가 고백을 저렇게 디데이를 정해놓고 하냐며 진짜 이상하다는 생각에 꽤나 웃겨 혼자 웃었다. 밤에 널 곱씹다 잠에 금방 들지 못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밤새도록 전화를 해주고도 아침이면 나를 깨워주기도 하는 그 친구에게 조금씩 스며들어버렸다. 너로 시작해 너로 끝나던 일상 속에 조금씩 비집고 들어온 그 친구는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오히려 좋았다. 편지지를 꺼내 네게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난 이 아이가 고백을 하면 받아줄 거 같다는 내용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너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과의 미래도 조금은 궁금해졌다며 내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고백한다며 선전포고를 한 당일 피시방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를 만나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인 편지봉투를 건네주고선 도망갔다. 나를 위해 잘 쓰지도 못하는 못생긴 글씨체로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였다. 내가 너에게 쓰던 편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쓴 편지를 보니 꽤나 기분이 묘했다. 놀리고 싶은 마음에 도망가려는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내서 편지를 읽자 다급히 유턴해서 내 입을 틀어막는 그 아이 때문에 웃음이 났다. 제발 조용히 읽어달라는 말에 웃음을 참으며 편지를 다 읽고 다시 봉투에 집어넣자 왜 대답을 안 하냐며 찡얼거리는 그 아이가 재미있었다. 장난으로 싫다고 했다가 시무룩해지는 표정을 보고선 사실 좋다고 답했다. 그 후 내가 최근 빠져 좋아진 게임을 몇 판 하다가 세상에서 제일 진부하게 데이트를 했다.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셨다. 생각보다 그 친구와 하는 진부한 데이트는 즐거웠다. 이후 네게 열심히 일기를 쓰며 이제는 학교 일이 아닌 그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었다. 너를 떠올리는 일도 나에게 마음을 주는 그 아이가 있어서 예전만큼 공허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네가 그리워 울던 내가 그 친구와 새벽까지 통화를 하며 즐거워하고 웃기도 한다. 다이어리를 펼치고서 그 아이에 대해 적는다. 색칠놀이를 좋아하는 날 위해 함께 색칠공부는 해주지만 색칠을 엄청나게 못하는 것과 나만 보면 귀가 아주 새빨갛게 변한다는 것 그리고 연양갱을 좋아하는 그 아이가 좋다는 그런 자잘한 내용을 담으며 지금 당장은 이 아이만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도 비슷하게 좋아질 수 있을 거 같다고 끄적이며 적었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수업으로 바빠졌다. 바쁜 와중에도 그 아이는 나에게 잠시 나오라며 1층으로 부르고선 종종 꽃을 선물해주고는 했다. 네 생각이 전처럼 문득 밀려올 때면 아주 가끔 기숙사에서 몰래 울기도 했지만 울고 난 뒤에는 금세 일상생활로 돌아와 괜찮은 시간들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고 교수님 추천으로 초콜릿공예프로그램 수업을 듣기 전 캠프를 갔다. 사천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본 밤하늘의 별이 너무 예뻤다. 너와 함께 못 봐서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캠프를 다녀오고 나서는 스무 살 프로필사진도 찍었다. 나의 20대를 모아서 네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너의 네 번째 기일이 다가와 전에 찍은 프로필 사진 한 장을 꺼내 편지지에 붙이고선 편지를 썼다. 내 사진을 다 모아주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와 함께 나 때문에 너무 많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적고선 편지봉투에 편지지를 접어 넣곤 다이어리에 달린 지퍼백에 넣었다. 이런 내 모습을 넌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너의 대답이 유독스럽게 참 간절했던 스무 살을 보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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