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하얗게 불태운 검정
“딩동댕동~”
퇴근 시간의 종이 울린다. 사무실의 사람들은 서로들 짐을 싸 떠나기에 정신없다. 혼자 남겨진 조용한 사무실은 때론 나만의 아늑한 작업실이 되기도 하고, 고독한 감옥의 독방이 되기도 한다.
십수 년 전 회사에 새로운 제조설비가 들어서는 시점, 우리 팀은 밤낮없이 테스트에 여념이 없었다.
아침이면 그날의 테스트 계획을 정리하고, 스텝들과 회의를 시작한다. 회의가 끝나면 공정 담당 스텝들은 라인에 들어가 그날의 계획에 맞추어 설비를 세팅하고, 우리는 라인에 흘려볼 새로운 조성비에 따라 액을 제조하다 보면 오전이 훌쩍 지난다. 오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테스트가 시작되고, 오늘도 어김없이 수많은 문제들을 떠안고 라인을 나서면 이미 해는 어둑해질 즈음이다. 내일도 아침부터 새로운 테스트가 시작될 터이니, 테스트가 끝났다고 퇴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스트품을 평가하여 무엇이 원인인지 판단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검증 계획을 세워야만 내일 또다시 이 일상을 반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이미 시곗바늘은 10시를 넘어가고 우리의 몸도 녹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로 퇴근하는 법이 없었다. 회사 앞에서 늦은 야식을 먹으며, 고생한 서로를 격려하거나, 야심한 밤임에도 자정을 넘긴 스크린골프를 치기도 하며 같이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던 팀원들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했다. 그 시절 함께 고생하던 동료들은 하나둘 다른 자리로 옮기기도 했고, 또 다른 회사로 떠난 친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때만큼 바쁘지는 않았지만, 사소한 잔업으로 회사에 홀로 남아 짧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문득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런 게 소위 말하는 번아웃일까…
아니 너무 불태워 더 이상 탈 것도 남지 않았다면 번아웃이 맞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일은 더 편해졌고, 몸도 더 편해진 시기에 찾아온 허무함…
마치 영화 ”허트 로커“ 속 주인공 제레미 레너가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평화로운 일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마트의 카트를 끌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나의 번 아웃은 조금 다른 색인가?
열정을 하얗게 불태워버렸으니 흰색이라고 해야 할까, 다 타버리고 새까만 숯만 남았으니 검은색이라고 해야 할까?
신기하게도 영어의 검은색“black”과 프랑스어의 흰색”blanc(만년설로 뒤덮인 흰 산을 뜻하는 몽블랑(Mont Blanc)의 그 블랑이다)”은 어원이 유사하다고 한다. 둘 모두 불타는 것과 연관되었다고 하니 번아웃의 색도 흰색일 수도 검은색일 수도 있을듯하다. 어떤 색이든 나의 열정도 아마 그 시절 다 타버려 무색무취의 blank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보니 내 열정의 원천은 내 자신의 에너지라기보다 함께 고생하고 서로를 알아주던 소중한 동료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있었기에 힘든 시간을 힘든 줄도 모르고 이겨내었던 것이다.
1, 1, 2, 3, 5, 8, 13…으로 자기 앞의 두 숫자의 합이 다음 숫자가 되는 피보나치의 수열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발견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하지만 피보나치수열은 1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한 변이 1인 정사각형 옆에 또 다른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을 붙인다. 이제 시계방향이든 반시계 방향이든 90도를 돌아 두 사각형이 붙여 만들어진 새로운 한 변에 딱 맞는 한 변이 2인 정사각형을 붙여 놓는다. 그리고 또 90도를 돌아 이번에는 1과 2가 합쳐 한 변이 3인 정사각형을 붙여가는 것이다. 이렇게 90도씩 돌아가며 한 변의 길이를 보면 그 길이가 바로 다음 피보나치수열의 수가 된다. 이런 식으로 그려진 사각형들을 따라 곡선을 그리면 바로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앵무조개의 패턴이 그려진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어깨를 기대어 다음 장을 만들어 갈 때 아름다운 황금비를 가지는 그림을 그려갈 수 있는 것이다. 피보나치수열처럼 든든한 한쪽 어깨를 내어줄 동료들이 그리워지는 날, 백지 위에 남긴 검은 점들을 보니 모든 것이 불타도 추억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