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상간 욕망은 진짜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고상하고 도덕적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충분히 통제하여 교양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상상은 무의식 속에서 피어나기에 쉽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섹스에 대한 상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맑은 저는 별 관심이 없지만, 동양, 서양 야동들 중 근친상간 장르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가족 구성원과의 성적인 접촉이 금기시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 간의 애정이 성욕으로 치환되지 않는 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야동 뿐만 아니라, 고전문학, 신화, 영화에 등장하는 걸 보면 참 오묘합니다. 있을 리가 없는 욕망을 사람들이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변태 선배님의 말씀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변태 선배님들 중 한 명인 프로이트를 찾아갔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의 이론이 과학보다 소설에 가깝다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선배님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순수하게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이 닿지 않는 깊은 무의식에 부모와 형제를 대상으로 한 묙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제가 변태 선배님을 언급하며 근친상간을 다루는 모습이 역겨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문학과 신화를 들여다보면 근친상간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고 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토마스 멜러리의 <아서왕의 죽음>, 현대적인 사례로는 한국영화 <올드보이> (2004)까지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기가 끊임없이 윙윙거려도 오늘부터 모기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듯, 고전문학과 신화를 넘어 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영화와 야동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해도 근친상간을 욕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등장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를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 무의식 깊은 곳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근본적인 충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근친상간을 강력한 금기로 설정하여, 거대한 문화적 장벽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인류를 야만에서 문화적 존재로 변화시켰다고 보았습니다. 인간 사회가 근친상간을 금기시한 것을 단순한 윤리적 규범이 아닌, 가족이라는 체계를 유지하고, 혼인관계와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장치로 본 것입니다. 물론 이 합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모든 인류가 한 자리에 모여, "오늘부터 밥은 손이 아닌 숟가락으로 먹는다!" 처럼 약속하지 않듯, 문화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들이 다수입니다.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것 또한 무의식 속에서 답습되고 정착한 사회적 구조 정도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시선을 그대로 옮겨 <오이디푸스 왕>의 서사는 단순 비극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향한 무의식적 욕망을 내려놓고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인류가 본능적 충동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근친상간은 없는 걸까?
많은 이들은 부녀와 모자 그리고 남매 간에 성욕은 없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굳건한 기둥을 들여다 보면, 무의식 속에 억눌린 욕망이 겹겹이 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근친상간이란 금기는 어떤 행위를 막는 게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더 강하게 의식하도록 만듭니다.
"저걸 먹지마" 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특정 욕망이 억압될 수록, 그것이 무의식의 깊은 층위에서 더욱 강한 심리적 욕망으로 자리 잡는다고 보았습니다. 고로, 인류에게 근친상간이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다워지는'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심리적, 사회적 틀을 안정적으로 형성하고 그 틀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문화를 익히고, 문학과 영화 등의 예술을 통하여 잠재된 욕망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친상간 야동물 매니아들은 저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찡따야, 그러면 근친상간이 실제로 없다는 거겠네? 하지만 나는 나의 여동ㅅ.. 아니.. 이건 엄중한 비밀이니 여기까지만 하지. 무튼,, 너는 틀렸어." (코 쓱, 눈물을 닦고, 먼 산을 바라며)
실제 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야동을 보면, 새엄마와 아들, 여동생과 오빠, 아버지와 딸 같은 설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콘텐츠는 어디까지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 자신의 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야동은 상상 속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판타지를 시각적으로 구성한 하나의 매체로, 금기를 상상으로 빚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친상간물 야동이 존재하고 이를 소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이 실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인간의 성욕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문화와 사회 그리고 무의식이라는 복잡한 층위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해석되는 결과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인류에 폰 노이만 같은 천재, 모차르트 같은 신동이 등장하듯, 80억 인구 중 누군가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을 보고 "혈연관계만 아니었다면.."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를 일반적으로 해도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논외로 연인 사이에서 마치 근친상간을 연상케 하는 상황극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 있는 폰 노이만, 모차르트급 변태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조금 너그럽게 바라보면 연인을 가족처럼 상상할 수 있다는 신뢰 정도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운동하면서 느낀건데;;;;;;;;;;;;;;;;;;;;;;;;;;;;;;;;;;;;;;;;;;;;;;;;;;;;;;;;;;;;;;;;;;;
운동을 하니까 게임할 시간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