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또 다른 시작
매일 바빴다. 일, 육아, 살림에 치여 살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건지, 쌓여가는 건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도 사치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은 초등, 중등, 고등을 졸업했다. 하나둘 대학에 가고 나서야 비로소 세월이 피부로 와닿았다. 직장에서도 경력이 쌓이면서 업무에 여유가 생겼고, 전자제품의 발전 덕에 나의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퇴직을 하고 아이들도 다 자라고 나니 변해 버린 세월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 TV도 시청하였다. 몇십 년 만에 보는 드라마인가, 드라마마다 남녀 주인공이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는 연예인이 없었다. 딸에게 “저 주인공이 누구야”라고 물었더니, “그것도 모르세요” 핀잔이 돌아왔다. 그 와중에 아버지, 어머니 역할의 배우가 낯익었다. 머릿속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고 나서야 알아보고 놀랐다. 저 사람, 청춘스타였던 사람, 나보다 나이가 적었던 걸로 기억되는 사람, 어느새 부모 역할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 곱던 배우들도 나처럼 늙어 왔나 보다.
직장을 떠난 후, 나는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출퇴근 시간을 피해 나다닌다. 도시철도 안에도 늙음이 가득 차 있었다. 직장 내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최연장자였다면, 도시철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어림잡아 최연소자였다. 그렇다고 내가 젊어진 건 아니었다. 그곳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나보다 연배가 높았던 것이다. 나도 만만찮은 나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주민센터나 도서관, 교육원에서 하는 강좌에 가보면 여기도 흰 눈송이, 저기도 흰 눈송이 온통 그랬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부터 사진 찍는 것이 싫어졌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 속에 세월이 함께 현상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화장으로 감추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늙음까지 찍어 내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과거에 즐겨보던 미드 ‘CSI’, ‘NCIS’ 출연 배우들의 현재 모습을 비교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얼굴이 반가웠지만, 시간이 흐른 후의 모습엔 탄식이 나왔다. 세월은 누구도 비켜 가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배우는 세상을 떠났다. 늙음 다음은 죽음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어머니는 종종 “늙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다. 지금에서야 공감이 간다. 희어지고 헐거워진 머리카락, 쭈글 해진 피부, 구부정한 어깨. 튀어나온 배, 가늘어진 팔다리,.. 모든 것이 세월이 남긴 흔적이었다.
어느 노래 가사엔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말을 바꾼다고 늙는 것이 위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늙어서 안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작은 행복, 조급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와 평온함, 경쟁의 치열함에서 물러난 관조, 인간관계에 따른 에너지 무소비 등
중국 수나라 사신의 트집 질문에 답을 해서 고구려 체면을 살린 이야기가 있다. 세 가지 질문과 답이다. 첫째 똑같이 생긴 말을 어느 쪽이 어미이고 새끼인지 알아내라, 답은 굶겼다가 먹이를 주면 먼저 먹는 쪽이 새끼이다. 두 번째 문제 네모난 나무토막의 위아래를 구별해 내라, 답은 나무는 밑에서부터 물을 빨아올리므로 물에 뜨는 쪽이 위쪽이다. 세 번째 코끼리 무게를 알 수 있는가, 답은 코끼리를 배에 태워 눈금으로 표시한 다음 코끼리를 내린 후 그만큼 될 때까지 무게를 단 돌을 배에 실으면 된다. 이런 답을 알려 준 이가 노인이다. 노인이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 답을 알려 준 것이다.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라’, ‘한 노인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소실되는 것과 같다’.‘나이는 기억력을 뺏은 대신에 통찰력을 놓고 간다’ 이런 격언들은 예전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글쎄요’싶다. 이제는 빌릴 노인보다 더 빠른 인터넷이 있고. 도서관 하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검색창이 있다. 인터넷은 늙지도 않고 오히려 더 젊어지고 더 현명해진다. 반면, 인간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누구나 떠난다.
나만, 우리만 노인이 되는 게 아니다.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노인이 되는 길을 걷고 있다.
시대는 변했더라도 늙음은 피할 수 없다. 이제는 ‘늙어서 좋을 것’을 찾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