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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말

난데없는 삶을 사랑하는 방식

by 장희은





오후 2시, 초등학교가 끝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지역아동센터에는 이런저런 소리들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센터에 마련된 간식부터 찾는 소리, 오늘 할당된 학습량을 체크하고 놀 계획을 짜는 소리, 같이 다니는 학교 친구에 대한 이야기, 저들끼리 쓰는 처음 듣는 유행어 소리까지…. 아이들이 저마다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을 들으며 출근하는 나는 가끔 아이들이 얘기하는 난데없는 소리들을 듣는 재미로 일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승부욕으로, 혹은 말장난을 위한 재미로 정체 모를 말들을 만들어낸다. 학습이 끝나고 아이들과 함께 놀 때, 우현이는 나에게 끝말잇기를 하자고 제안하곤 한다. 아이들을 상대로 끝말잇기를 한다고 그들을 얕보면 안 된다. 그들은 학교에서 끝말잇기 고수가 되기 위한 한방단어 콜렉터들이기 때문이다. 한방단어란 끝말잇기에서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는 단어들을 말하는데, 예컨대 ‘이리듐’, ‘마그네슘’ 등의 단어들이다. 까딱해서 ‘이’ 혹은 ‘마’로 끝나는 단어를 썼다가는 꼼짝없이 당하는 거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몇 번을 당한 나는 아이들의 기술을 그대로 써먹기 시작했다. 우현이가 ‘이’로 끝나는 단어를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보란 듯이 “이리듐!”이라고 외쳤을 때였다. ‘당했다’는 표정의 우현이는 그대로 나에게 지는 게 죽어도 싫었는지, 정체 모를 말을 지어냈다. “듐골렘.” 핸드폰을 동원해 검색까지 해가면서 이 단어는 없다고 증명하는 나를 우현이는 배짱으로 제압해 버렸다. 결국 나는 ‘듐골렘’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이어 ‘렘수면’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현이는 ‘면치기’라고 뻔뻔하게 끝말잇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우현이와 같이 끝말잇기를 할 때면 사용되는 뻔뻔 대잔치 사이클이 생겼다. ‘이리듐’, ‘듐골렘’, ‘렘수면’, ‘면치기’…. 정말 가끔 끝말잇기가 너무 길어지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외계어를 남발하기도 한다. 그 외계어들은 정말 너무 이상해서 일일이 기억해 타이핑을 칠 수도 없다.


아이들의 사생활이 가장 많이 생기는 공간 중 하나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일을 하다 보면 듣게 된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의 말을 듣던 중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이야기도 있다.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치정이다. 내가 채점할 문제집을 들고 내 앞으로 온 홍규는 난데없이 나에게 묻는다.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온 나는 면역이 생겨 뻔뻔스러운 얼굴로 답한다. “비밀인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홍규를 뒤로 하고 채점을 마저 하려는 순간이었다. “저는 여자친구가 2명이에요.” 비밀인 듯 나에게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홍규. 순간 놀라 채점을 멈추고 홍규를 본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퉁퉁 부은 것처럼 살이 차올라있는 홍규의 얼굴을 빤히 본다. “너.. 여자친구가 뭔지는 알아?” “네. 알죠. 근데 비밀이에요.” 속삭이지만 당당하게 말하는 홍규다. “너 그거 여자친구들도 아니?” “아니요, 몰라요. 근데 애들이 다 알게 될 것 같아요.” 나는 홍규의 말이 고민상담인지, 자랑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사이 홍규는 채점이 다 된 문제집을 들고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내 반응을 보고 싶었던 건가? 또 나는 이상한 마음을 품고 계속해서 다른 아이들의 문제집을 채점한다.


또 어느 날은 승연이가 난데없이 다가와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가슴이 있어요?” “응..?” 예고 없이 날아오는 직격탄에 당황한 내게 승연이가 덧붙인다. “선생님은 가슴이 있는데, 저는 없어요.” 그제야 승연이의 말 뜻을 이해하고 웃는다. “그건 승연이가 더 언니가 되면 생기는 거야.” 웃으며 말하는 내 말에 승연이는 인상까지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한다. ‘도대체 내 가슴은 언제 생기는 거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다. 그런 승연이가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던 날, 승연이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중등부가 등원하는 시간이 되자 다시 나에게 돌아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근데 선생님 가슴이 민경이 언니보다 작아요.” 이제 막 중등부로 올라간 뒤 키가 훌쩍 크고 있는 민경이었다. 승연이의 말에 말문이 막힌 나는 등원해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민경이를 슬쩍 본다. 그리고 승연이를 향해 말한다. “이건 사람마다 다 다른 거야. 승연이 얼굴이랑 선생님 얼굴이 다르지? 그런 것처럼..” 승연이는 ‘아~’하고 이해한다. 승연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하며 바라보는 나는 괜히 가볍게 돌아 뛰어가는 승연이가 얄미워 보인다.


당황스러운 고백도 있다. 우진이는 늘 초등 학습 시간에 학습하지 못하고, 뒤늦게 등원해 학습을 한다. 방과 후 축구 클럽에서 축구를 하기 때문이다. 우진이는 축구 훈련을 하고, 어느 날은 축구 경기에 나갔다 온다. 그날 우진이의 표정을 보면 우진이의 팀이 경기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 있다. 우진이는 그렇게 남들보다 늦게 등원할 때마다 중등부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는 나를 기다린다. 구석에서 숨어있다가 타이밍에 맞춰서 나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다. 놀라는 모습이 재밌는지 몇 번을 반복하던 우진이는 어느 날, “왁!” 하고 나를 놀라게 하는데 제대로 성공했다. 늘 숨어있던 곳과 다른 곳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진이가 두 배로 반가워 인사를 하려는데, 우진이는 나를 따라와 난데없이 고백을 해왔다. “선생님, 사랑해요!” 센터를 다니면서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나..? 나를 당황시키는 기분 좋은 말에 “나도 사랑해.” 기분 좋게 답을 했던 날도 있다. 아마도, 그날은 우진이가 경기에서 이겼던 날일 거라고,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아이들이 내뱉는 난데없고도 순수한 말들은 나를 당황시키고, 웃긴다. 때 묻지 않은 감정들과 호기심을 내비칠 때면 나도 동화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은 그런 힘이 있다. 그리고 정말 가끔, 아이들의 그 난데없이 순수한 말들은 나를 몰래 울리기도 한다.


여느 때와 같이 학습이 끝나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던 시간이었다. 나에게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던 승연이는 여전히 나를 좋아해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자리에 앉으면 내 핸드폰을 들어 요리조리 만지기도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 핸드폰을 만지던 승연이는 잠금화면을 꾹 눌러 내 예전 잠금화면들을 쭉쭉 넘겨냈다. ‘요즘 애들은.. 핸드폰을 정말 잘 만지는구나..’ 생각하며 가만히 보고 있을 때, 승연이가 소은이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 잠금화면을 터치했다. 작년 9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소은이었다. 그때, 승연이는 사진을 보고 물었다. “강아지 무지개다리 건넜어요?” 순간 헉, 하며 승연이를 보는 날 승연이는 이상하게 쳐다봤다. 승연이는 작년 9월 내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나에게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응.” 대답하는 나를 본 승연이는 다시 설정된 잠금화면을 본다. 그 잠금화면에는 여전히 나와 소은이가 함께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선생님 강아지가 너무 그리워요.” 승연이의 말이었다. 당연히 승연이는 소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소은이 얘기를 많이 들은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승연이는 강아지가 그립다고 말했다. ‘보고 싶겠다, 그립겠다.’라는 말이 아닌 자신의 입장처럼 말하는 승연이의 ‘그립다’는 말은 내 마음에 곧바로 들어왔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아지를 그리워하는 승연이의 순수함이 시간이 흘러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대신해준 것이다. 몇 개의 새로운 잠금화면으로 밀어 넣었던 것처럼 숨겨놓은 소은이에 대한 감정들이 순간 눈앞으로 다가왔다. "응, 나도 그리워." 그렇게 승연이의 앞에서 오랜만에 말로 꺼낸 감정은 한동안 승연이가 바꿔놓은 잠금화면을 바꾸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오래 나에게 남아있었다.





가끔은 정말 난데없는 곳에서 난데없는 소리들을 듣고, 때로는 난데없는 위로를 받게 되는 삶이 소중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이런 우연들이 모여 하나의 내 삶이 되는 것 같다고. 아이들로 마주한 난데없는 순간들이 가끔씩 계속 떠오를 것 같은 날, 나는 느닷없음을 사랑하게 되는 방식으로도 삶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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