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한두 개는 있다.
이것은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결이 약간 다르게 쓰인다.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복사되는 것으로
특정한 알레르기가 있다던가, 기관지가 약하게 태어났거나 하는,
유전자 복사가 이루어져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어떠한 성향이나 집안 분위기 등,
내가 노력만 하면 다음 세대인 내 자식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1%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는 차이가 있다.
당신은, 절대로 내 자식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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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이 싸우셨다.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엄마가 아빠에 대해 늘 가지고 있는 불만이었고,
그로 인해 일상의 짜증과 화가 있는 집이었다.
첫째였던 나는 부모님의 싸움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싸움 후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위로하는 역할도 내 몫이었고,
동생들을 달래고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성적을 잘 받아오면 유일하게 부모님 두 분 다 기뻐하셔서
나는 거실에서는 부모님이 싸우는데도
내 방에서 숨죽여 시험공부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첫째 딸인 내게 엄마는 많이 의지하셨다.
아빠의 무능력이 우리 집을 망치는 것 같았고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내가 엄마를 더 이해하고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했고 아빠보다 월등히 뛰어난 경제력으로
대구에서도 집값이 비싸다고 알려진 동네에서,
그것도 가장 치열한 학군에서 학원과 과외를 끊이지 않게 서포트 해주셨다.
좋은 학군, 브랜드 옷, 충분한 용돈 등.
우리 가족은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불만은 돈이 없는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일반 가정보다 여유가 있었다.
엄마의 짜증과 화는
자신의 뛰어난 경제적 우월감과 함께
본인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주는 배우자에 대한 원망,
남편보다 많이 벌고 있는데 내세우지 못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남편이 무능한 것에 대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상황,
앞으로도 아이 셋을 키우고 교육하려면 얼마의 세월을 더 버텨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였던 것이다.
엄마의 아빠에 대한 불만은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결혼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매년 나빠지는 한국 경제는 엄마의 걱정과 짜증의 원인이었고,
엄마에게 있어 근본적인 원인은 항상 아빠에게 향해 있었다.
“너희 아빠가 나랑 말이 조금만 통한다면..”,
“너희 아빠는 무식해서 집안 경제 상황을 의논할 수가 없다..”
“네가 일찍 시집가 버려서 너희 아빠가 저런다."
"집안에 맏이가 있어야 하는데 너는 그렇게 미국으로 시집가버렸으니..
"네가 좀 아빠한테 말해서 잘하라고 해봐라..”
결혼한 후 가정을 가진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또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거의 혼자 짊어지면서
세 자녀의 교육과 생활을 책임져야 했고,
그런 엄마에게 남편과의 소통은 어려웠고,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단함, 그리고 억울함..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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