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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기하학: 서울방정식 (프롤로그)

프롤로그: 벽과 창문 사이

by 사우스파크

프롤로그: 벽과 창문 사이


"인간의 삶은 공간의 기하학이다. 당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

— 공간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 '공간의 시학'을 읽다가 밑줄 친 문장


봄비가 서울의 밤을 씻어내리는 수요일 저녁, 임지수의 검지가 결로로 흐릿해진 창문 위에 방정식을 그려나갔다. 깊은 곤색 하늘을 배경으로, 빗방울은 도시의 불빛과 만나 프리즘처럼 빛을 분산시켰다.


이런 날씨에는 언제나 강남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가장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수백 개의 별들이 완벽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배열된 별자리처럼. 지수의 손가락이 창문 위에 마지막 변수를 더했다.


부동산 = 시간 × 위치 × 레버리지


물방울이 공식을 따라 흘러내리며 등식을 왜곡시켰다. 마치 현실이 이론을 조롱하는 것처럼.

"쉽지 않네," 그는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수학 공식일 수 있겠지만, 지수에게 이것은 생존의 방정식이었다. 가진 것 없이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한 암호 같은 것. 그는 손가락을 닦고 원룸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그의 우주의 전부였다. 12평, 외곽 위치, 낡은 4층짜리 연립주택. 욕실과 주방이 하나로 붙어있는 '원룸'이라는 이름의 상자.


책상 위에는 전세 계약서가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임대인이 보낸 새 계약서와 쪽지가 있었다. 지수는 집어들어 다시 한번 읽었다.


"시세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5% 인상은 최소한의 조정입니다. 빠른 결정 부탁드립니다. 관심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렴하다니. 전세금 1억에 월세 30만원. 서울 외곽 원룸치고는 '저렴'할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서는 결코 가벼운 숫자가 아니었다.


3년 전,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기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유망한 스타트업의 마케팅 과장으로서, 연봉 5,500만원. 당시의 그는 미래가 밝다고 확신했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몇 년 후에는 내 집 마련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트북을 열고 자신의 재정 상황을 담은 엑셀 파일을 불러왔다. 스프레드시트의 냉혹한 숫자들이 청백색 화면을 채웠다. 전세 보증금 1억, 월세 30만원, 생활비 150만원, 학자금 대출 상환 40만원... 매달 겨우 80만원을 저축할 수 있었다.


손가락이 다음 시트로 넘어갔다. '강남 아파트까지 남은 거리'라고 이름 붙인 페이지였다.

현재 강남 30평형 아파트 평균 시세: 15억 원 현재 저축액: 2,880만원 월 저축 가능액: 80만원 (연간 960만원) 단순 계산으로 필요한 시간: 156년


156년. 그 숫자는 화면에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게다가 이 계산은 부동산 가격 상승이나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는...

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이건 숫자로는 해결할 수 없는 방정식이었다.


그는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한강 너머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들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불과 5.7km 떨어져 있지만, 경제적 거리는 천문학적이었다. 10억이 넘는 자산, 2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가 그를 그곳에서 가로막고 있었다.


"공간의 기하학..." 지수는 창틀에 놓인 바슐라르의 책을 집어들었다. 이미 귀퉁이가 접히고 중요한 문장들에 형광펜이 그어진 책이었다. "당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

휴대폰이 진동하며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화면에는 '정훈'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친한 친구였다.


"여보세요?"

"지수야! 이번엔 꼭 와라." 정훈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원석이 강남에 집 샀대. 오피스텔이긴 한데 그래도 강남이야. 우리가 라면 나눠 먹던 그 원석이 말이야. 이번 주말에 집들이 한대."


지수의 손가락이 단단히 휴대폰을 쥐었다. 원석. 대학 시절 그와 함께 끼니를 거르며 편의점 알바를 뛰던 친구. 항상 셋이서 어울렸던 '삼총사'였다. 이제는 원석이 먼저 강을 건넜다. 다른 우주의 주민이 되었다.

"...갈게." 지수는 잠시 침묵 후 대답했다. "어떻게... 어떻게 했대?"

"부모님께서 보증금 좀 도와주시고, 대출받고, 주식도 좀 잘 됐다던데... 자세한 건 만나서 물어봐."


통화를 끊고 지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과 스모그가 별빛을 가렸다. 대신 빌딩의 불빛이 인공 별자리를 그렸다. 그 중 가장 밝게 빛나는 강남의 성좌. 저 별자리를, 저 우주의 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원석은 어떻게 방정식을 풀었을까?

지수는 책상으로 돌아가 전세 계약서를 집어들었다. 펜을 들고 서명하려다 멈췄다. 이 서명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향한 또 하나의 선택이었다. 이 작은 원룸에서 또 1년을, 또 다른 5%의 인상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정식을 찾아 나설 것인가?


창가의 작은 다육식물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군인 시절 전역하는 선임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얘는 물 한 방울 없이도 한 달을 버티는 생명체야. 살기 힘들 때 쳐다봐." 지수는 손가락으로 화분의 단단한 흙을 만졌다.

"너는 어떻게 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남지?" 그는 식물에게 물었다.


식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적응하고, 기다리고, 때를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방정식을 찾는 것. 다른 사람의 공식이 아닌, 나만의 해법을.


그는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1년. 이번 1년은 다르게 살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른 공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부의 기하학이 지배하는 서울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그만의 방정식을.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는 스탠드 조명을 끄고 달빛에 의지해 앉았다. 창문과 그 사이에 그의 실루엣이 벽에 드리워졌다. 벽과 창문 사이, 현실과 꿈 사이, 그는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창문에 그려진 방정식 위로 달빛이 반사되어 빛났다. 흘러내린 물방울이 만든 왜곡된 등식이 이제는 마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임지수는 노트북을 다시 열고 새 문서를 만들었다. 제목을 입력했다.


'부의 기하학: 나만의 서울 방정식'


방 안을 채우는 키보드 소리와 함께, 그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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