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민주주의는 중대 기로에 섰다
현재 상황
에르도안이 속한 터키의 정의개발당(AKP)의 지지율은 2011년 49%에서 2023년에는 35%까지 주저앉은 상황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24년 10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금 대선이 치러질 경우'를 가정한 가상 양자대결에서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주요 야권 후보들에게 모두 열세를 보여주었습니다.
터키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의 시장인 이마모을루와 에르도안은 49.0% 대 30.6%로 이마모을루가 약 18~19%p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마모을루가 속한 공화인민당(CHP)의 신임 대표 오즈귀르 외젤과의 가상대결에서도 45.2% 대 31.2%로 에르도안이 크게 뒤졌고, 터키 수도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쉬와의 대결에서는 53.8% 대 28.7%로 이마모을루 보다도 더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르도안은 야권 최대 정적인 이마모을루의 2028년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왔습니다. 터키는 헌법 101조에 따라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 학사 학위가 필요한데,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대학 이사회를 압박해 이마모을루의 학사 학위를 지난 3월 18일 취소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검찰을 이용해 3월 19일 각종 부패와 테러 지원 혐의를 명목으로 임시 구금(gözaltı)시켜버렸고(gözaltı는 구속영장 없이 수사기관의 판단만으로 최대 7일까지 구속할 수 있는 터키의 형사소송법상 제도입니다.), 지난 23일 법원으로부터 부패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받아냈습니다.
당연히 CHP를 비롯한 야권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반(反)에르도안 성향의 시민들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월 26일까지 '시위 금지'조치가 내려졌지만, 지난 토요일인 3월 22일에는 경찰 추산 30만명, 야당 추산 100만명의 시민들이 이스탄불과 앙카라 같은 대도시 등지에서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습니다. 에르도안은 이 시위를 '악(evil)'으로 규정짓고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하며 강경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EU 등 국제사회의 우려와 비난이 따랐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던 어제 3월 24일, 이마모을루가 제1야당인 CHP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습니다. CHP의 당원은 150만명 정도지만 CHP는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대선 후보 경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여기에 약 1500만여 명이 이 투표에 참여하며 에르도안의 최대 경쟁자인 이마모을루를 후보로 확정지은 겁니다. 터키의 인구가 8500만명 수준이니, 한국으로 따지면 약 850만명이 투표에 참여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무현이 선출된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63만명, 박근혜 탄핵 직후인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214만명이 제한적 오픈 프라이머리 경선에 참여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터키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느껴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범위한 국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마모을루가 에르도안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견제를 결국 이겨낼 지는 장담할 수 없니다. 터키의 정치는 더욱 불확실성이 지배해가고 있고, 경제도 충격을 받아 추락하고 있습니다. 달러 표시 리라화 가치는 한때 14.5% 하락했고, 2045년 만기인 터키 국채는 최대 1.6센트 하락해 2024년 초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습니다. JP모건도 터키의 연말 인플레이션 예측치를 27.2%에서 29.5%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에르도안의 4연임 수단으로 조기 대선이 열릴 수도 있지만, 현재로선 공식적으로 대선이 있는 2028년 이전까지의 터키는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한 일정을 보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2000년대 이후 현대 터키의 정치사와 정치 지형
1. 현대 터키의 정치 지형 개황
터키의 현대 정치사는 세속주의를 수호하는 기득권 세력과 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보수 세력 간의 경쟁과 긴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속주의 진영은 건국 이념인 케말리즘에 따라 정교분리를 중시하는 집단으로, 군부·사법부 등 관료 엘리트,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시 중산층과 일부 기업계 엘리트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은 터키 공화국의 세속적 정체성(라이스타틀리크, Laiklik)을 지키는 것을 중시해왔고, 과거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와 정치 개입을 통해 이슬람 성향 정부를 견제해왔습니다.
한편 이슬람주의·보수주의 진영은 오스만 말기와 공화국 초기에 억눌렸던 종교적 보수층이 정치 세력화한 것으로, 전통 신앙심이 강한 농촌 및 소도시 주민, 이슬람 운동가, 종교 교육기관 출신 엘리트, 보수 성향 재계 (이슬람 상공업자)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자유의 확대와 전통적 가치의 존중 등을 요구하며 19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2002년 AKP를 통해 중앙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에 2013년까지 AKP와 협력관계였던 펫훌라흐 귈렌의 이슬람 사회운동(히즘메트)도 보수 진영의 주요 세력으로 교육·언론·사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양 진영의 지지층 분포를 보면 세속주의 진영은 주로 서부 대도시와 공업화된 도시 지역, 공무원·법률가·장교 가문 등에서 강세이며, 여성의 사회참여와 서구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계층이 다수입니다. 이슬람 보수 진영은 중부와 동부 아나톨리아 내 보수적인 농촌 지역, 도시 저소득층과 이슬람 신앙 공동체, 나크시반디·누르주 등 종교 네트워크를 통해 결집한 지지층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2. 현대 터키의 정당사
이를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 터키의 정당 지형 변화를 보자면, 우선 2002년 총선에서 이슬람계 보수 성향의 AKP가 돌풍을 일으켜 34% 득표로 550석 중 363석을 차지하며 단독 정권을 수립한 것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1996년 복지당(RP)이 세속주의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후 다시 창당된 미덕당(FP)도 같은 이유로 또 2001년에 해산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한번 창당된 정당이 AKP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슬람 보수 정당의 생명력은 끈질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때 RP의 인력을 추스려 AKP까지 재창당을 이끈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현 대통령으로 알고 있는 에르도안입니다.
한편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1923년 창당된 CHP는 터키 세속주의 세력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초까지 CHP를 비롯한 전통적인 정당들은 부패와 경제 위기 문제로 몰락해 CHP만 원내 정당 지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2002년 총선으로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계 정치세력이 절대다수를 점하는 의회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군부와 관료를 비롯한 전통적인 기득권 '세속 엘리트'의 영향력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AKP는 이슬람세력을 기반으로 도시 저소득층, 보수적 중산층,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을 지지층으로 흡수하며 터키 남부의 안탈리아 해안부터 아나톨리아 반도 내부에 이르는 지지 기반을 다졌습니다. 2011년 총선에서는 49.8%라는 기록적인 득표를 하면서 그 기세가 정점에 달했습니다. 반면 제1야당인 CHP는 이스탄불·앙카라 등의 도시 중산층, 서부 해안지역, 알레비 종파 등 소수종교 집단의 지지를 받았지만 '우클릭'을 통한 저변 확대는 하지 못하는 구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때쯤 터진 사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2007년 'e-메모랜덤' 사태입니다. 당시 총리였던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가정 출신의 외무장관 압둘라 귈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는데, 군부가 홈페이지에 세속주의 수호를 천명하는 성명을 게시한 것입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세속주의 수호 세력의 시민들이 수십만 명 규모의 시위를 조직해 이슬람주의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에르도안 정부는 물러서지 않고 조기 총선을 실시해 정면 승부를 걸었는데, AKP의 압승으로 결론나면서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귈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군부·사법부 중심의 세속 엘리트가 민선 보수 정권의 정당성 앞에 후퇴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에르안이 정치적으로 기사회생한 2008년 AKP 위헌정당 심판도 정치사적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e-메모랜덤' 사태에 이어서 세속 진영은 사법부를 통해 반격을 이어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RP와 FP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AKP도 'Laiklik'(세속주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해산 심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재판관 11명 중 6명이 해산에 찬성하면서 단 1명 차이로 AKP가 간신히 해산을 모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때 AKP가 해산되었다면 현대 터키 정치는 크게 역변했을 것입니다.
AKP가 한창 잘 나가던 2008~2012년에 이뤄진 '에르게네콘·발요즈' 조사도 짚고 넘어갑시다. AKP 정권은 귈렌 운동과 공조하여 세속주의 군부 내 쿠데타 획책 세력을 숙청했는데, 2008년부터 수백 명의 전·현직 장성, 언론인, 학자들이 '에르게네콘' 비밀결사 및 '발요즈(망치)'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기소됐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군부 내 케말주의 세력의 쿠데타 음모를 응징하는 것이었으나, 훗날 증거 조작과 혐의 과장 등의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실상 AKP-귈렌 진영이 군부의 세속주의 '올드 가드(Old Guard)'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정치 개입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고, 세속주의 진영은 조직적 저항 거점을 크게 상실했습니다.
2013년 수백만 명이 참여한 '게지 공원' 시위는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세속주의 민중운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탄불의 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환경 운동으로 시작됐지만 점차 에르도안 정부의 권위주의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로 확산되었습니다. 시위를 주도한 세속주의 대학생들은 특히 주류 판매 규제, 공공장소 애정행위 비난, 언론 탄압 등에 반발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들을 "깡패(Çapulcu)"라 부르며 최루탄과 물대포로 강경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다시 정당사로 돌아와서, 2014년 친쿠르드 계열 정당이 인민민주당(HDP)로 재편되며 전국정당화를 추진한 일을 언급해야겠습니다. HDP가 2015년 총선에서 13.1% 득표로 80석을 얻으면서 사상 최초로 친쿠르드 진보 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이루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보수 쿠르드 유권자 상당수가 AKP를 이탈하면서 2011년 49%였던 지지율이 2015년 41%로 급락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로 인해 AKP는 2002년 집권 이래 처음으로 의회 과반을 상실했습니다.
HDP는 쿠르드계 뿐만 아니라 좌파 진보 성향의 청년과 도시 자유주의층까지 흡수하며 AKP를 견제하는 원내 제4정당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렇게 터키 의회 구성은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행동당(MHP)까지 합하여 AKP-CHP-MHP-HDP의 1강-1중-2약의 다당제 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벌어진 것이 2016년 군부 쿠테타 미수 사태입니다. 이것은 터키 현대사에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2016년 군부 쿠데타 미수 : 경과, 실패 원인과 여파]
2016년 7월 15일 밤, 군 상층부 내 일부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조직은 자신들을 '평화위원회'라고 칭하며 앙카라와 이스탄불 등지에서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탱크와 병력이 다리를 봉쇄하고 전투기가 의회를 폭격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었으며, 합동참모의장 헐루시 아카르 장군이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감금당하기도 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휴가중이던 휴양지 마르마리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스마트폰 페이스타임을 통해 민중에게 “거리로 나와 쿠데타에 맞서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호소를 접한 수만 명의 시민들이 국기와 함성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 차량을 막아섰고, 경찰과 충성파 군인들도 반란군에 저항하여 수 시간 내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쿠데타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물로는 공군의 아킨 외즈튀르크 전 참모총장, 특전사령부의 셰리프 테르지 장군 등이 지목되었고, 정부는 이들이 에르도안 정권에 반감을 가진 군내 파벌과 펫훌라흐 귈렌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슬람 성직자 긜렌을 쿠데타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이들의 네트워크를 '페토(FETÖ) 테러조직'으로 규정했습니다. 귈렌은 쿠데타 관여를 부인하며 '에르도안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지만 터키 정부와 여야 정당, 정보기관은 반대 근거를 제시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쿠데타 시도 당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전국 곳곳에서 교전과 충돌이 이어져, 군인·경찰·민간인을 포함 250여 명이 희생되고 2,200명 이상 부상당했습니다. 특히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교량(현 7·15 순교자 다리)에서는 시민들이 탱크에 짓밟히거나 총격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앙카라 의사당이 전투기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군은 결국 새벽 무렵 대부분 항복하였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로 귀환해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쿠데타는 발발 약 5~6시간만에 진압되었고, 7월 16일 아침 터키 정부는 “쿠데타 실패”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① 사전 계획 유출과 준비 부족
터키 국가정보기관(MİT)의 하칸 피단 국장이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여 경고를 보냈고, 이에 쿠데타 측은 예정 시각보다 6시간 이른 저녁 9시에 성급히 행동 개시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작전이 체계 없이 서둘러 진행되어, 군 내부 지휘체계에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시작 직전 반란군 주모자 중 한 명인 세미흐 테르지 장군이 진영 내 애국 장교 오메르 할리스데미르에게 사살되는 사건도 발생해, 쿠데타군 사기가 크게 꺾였습니다.
② 상층부의 미지원과 군 내부 분열
당시 합참의장 등 최고위 장성들은 쿠데타에 반대했고, 현장에 있던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즉각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규 지휘계통을 벗어난 일개 파벌의 모험이었기에, 군 대부분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란 세력이 동원한 상당수의 병사들은 진짜 임무 목적을 모른 채 출동한 징집병들이어서, 민간인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에 동요하여 속속 투항했습니다.
③ 에르도안 대통령 등의 신변 확보 실패
쿠데타 성공에는 정권 핵심 인물의 신병 확보 또는 제거가 필수인데, 반란군은 이에 실패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머물던 휴양지 호텔에 특전대가 들이닥쳤지만 불과 수십 분 차이로 놓쳤고, 귀빈기를 추적하던 반란군 F-16 전투기들도 교신혼선 등으로 격추 기회를 놓쳤습니다. 대통령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무사히 착륙해 TV 생중계에 등장하는 순간, 쿠데타군의 심리적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④ 언론·통신 제어 실패와 국민 저항
현대 쿠데타는 대중 매체를 장악해 정부 전복을 기정사실화하는 심리전이 중요한데, 반란군은 국영 TRT 방송과 일부 군 채널만 점거했을 뿐 민영 TV, 인터넷, 이동통신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에르도안이 생중계로 호소하고 SNS를 통해 호국 메시지가 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쿠데타에 맞선 전례 없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걸고 탱크를 막고 병사들을 설득하는 모습은 군인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쿠데타군은 과거 쿠데타와 달리 위험을 무릅쓴 대중의 저항 앞에 사기가 크게 꺾였고, 이것이 결정적인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쿠데타 진압 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곧바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비상대권을 활용해 국회를 우회한 통치에 나섰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성과(?) 중 하나가 2017년 국민투표를 통해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개헌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쿠데타 충격으로 강력한 지도자체제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틈을 타 추진된 이 개헌은 국민투표에서 51% 찬성으로 가결되었고, 이에 따라 2018년부터 에르도안은 권력이 대폭 강화된 집권 대통령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쿠데타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강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에르도안 측 논리가 일부 먹혀들었기 때문인데, 야당은 이를 쿠데타 실패를 이용한 일인체제 굳히기라고 비판했습니다.
사법부와 행정부에서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2년간의 비상사태 기간 동안 군인, 경찰, 관료, 판사, 교수 등 125,000명 이상이 직위 해임 또는 정직되었고, 쿠데타에 대한 조직적 관여 혐의로 5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습니다. 정부는 특히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된 귈렌 운동 관련자들의 색출에 주력하여, 군 장교 7,655명(장성 150명 포함)을 강제 전역시키고 군사학교를 폐교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습니다. 사법부에서도 판검사 약 3천 명이 해임·구금되었고, 이들의 빈자리가 친정부 성향 인사들로 채워지며 법원 인적 구성이 대대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큰 타격을 입어 친정부 매체를 제외한 언론사 156곳이 폐쇄되고 언론인 100여 명이 투옥되어 터키는 세계 최대 언론인 수감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외 관계 측면에서도 2016년 쿠데타 미수는 터키 외교노선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터키 정부는 사건 직후부터 미국에 망명 중인 귈렌의 신병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이때 미국이 귈렌 인도를 주저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과 NATO 동맹국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상실했습니다. 이후 터키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급속히 강화하기 시작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쿠데타 한 달 후 에르도안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성사시키며 냉각되었던 양국관계를 복원했고, 2017년에는 미·NATO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제 S-400 미사일을 도입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 시리아 내전 해법을 위해 러시아·이란과 함께 아스타나 프로세스를 주도하며 서방을 배제한 지역 협력에 나섰습니다. 이런 동방으로의 외교 축 이동은 부분적으로 쿠데타 이후 터키의 고립감과 서방의 인권 비판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편 유럽 측도 터키의 인권 후퇴를 문제 삼아 2018년 유럽의회가 터키의 EU 가입 협상 중단을 권고했고, 유럽평의회(PACE)는 2017년 터키를 민주주의 특별감시국가 목록에 재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에르도안이 강화된 대통령 권한을 권위주의적으로 행사하면서 터키의 인권 상황이 악화된 것에 따른 국제사회의 신뢰 저하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2016년 쿠데타 미수는 터키 정치의 권력구조를 에르도안 1인 중심으로 재편하고, 세속·이슬람 구도 대신 친에르도안 vs. 반(反)에르도안이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를 공고히 했습니다. 동시에 터키 군부의 정치 개입 전통을 종식시키고, 민주제도와 법치주의 측면에서 퇴보를 가져왔습니다.
2. 현대 터키의 정당사 (이어짐)
이렇게 반(反)에르도안 전선이 결성되면서 집권당인 AKP에 협력하던 MHP 내부에서 이탈 세력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좋은당(İYİ)을 창당하여 2018년 총선에 처음 참여해 9.96%의 득표로 43석을 확보하며 원내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İYİ는 세속주의 성향의 중도·보수 민족주의층을 대변하며 MHP와 보수표를 양분하였고, 이렇게 터키 의회는 AKP-CHP-MHP-HDP-İYİ의 5당 체제로 재편되었습니다. 2018년 총선 결과를 보면, AKP 42.6% (295석), CHP 22.6% (146석), HDP 11.7% (67석), MHP 11.1% (49석), İYİ 9.96% (43석)으로 집계되어 AKP-MHP 연합이 과반을 약간 웃도는 344석으로 국정을 주도하고 야당들은 연대하여 견제하는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CHP가 2010년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대표 취임 이후 정책 노선을 중도화하고 보수층 포용을 시도하며 2018년 총선에서는 İYİ당 등과 “국민연합”을 구성했던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이상과 같은 선거 결과 변화를 정리하면, AKP 지지율은 2002년 34%에서 2011년 49% 가까이 올랐다가 2023년에는 35%대로 하락하며 장기 집권 피로와 경제난으로 일부 지지층 이탈을 보였습니다. CHP는 20~25%대를 유지하면서 2023년 총선에서 25%대 중반으로 약간 상승했고, MHP는 10% 안팎으로 안정적인 소수 정당 위치를 지켰습니다. 친쿠르드 좌파(HDP계)는 10~13%로 존재감을 이어갔으며, İYİ당은 약 10% 내외로 중도보수 제3지대를 차지하는 상태입니다. 아래 도표는 2002년 이후 주요 정당들의 전국 득표율 추이를 보여줍니다.
이는 곧 유권자 지지층의 분화와 지역별 표심의 재편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AKP를 지지하던 동남부 보수 쿠르드계 유권자 상당수가 2015년 HDP로 이동했고, MHP의 강경 보수 표 일부는 İYİ당으로 이동했으며, 대도시 청년·중산층은 점차 CHP와 새로운 야당들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이런 흐름은 2019년 지방선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 선거에서 야당은 세속·보수 진영을 막론한 “반(反)에르도안”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앙카라, 이스탄불 등 대도시 시장직을 석권했습니다. 특히 지난 25년간 이슬람계 보수정당 텃밭이었던 이스탄불에서 이마모을루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승리하자, 선거관리위원회(YSK)가 AKP의 이의를 받아들여 선거 무효 및 재투표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6월 재선거에서 이마모을루가 약 9%p 차로 더 큰 승리(54%)를 거둬, 민심이 정부의 개입에 반발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세속 야권 지지층의 결집과 민주 절차를 방해하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종합하자면 세속주의 진영은 군부 쿠데타 압박, 사법부 판결, 거리 시위 등의 방식으로 이슬람주의 보수 정권에 도전해왔고, 보수 진영은 민주선거 승리, 사법개혁 및 숙청, 언론·행정 장악 등을 통해 세속 엘리트의 영향력 약화에 성공해왔습니다. 2020년대 들어 양측 간 힘의 균형은 여전히 팽팽한 가운데, 에르도안 체제 하에 국가 기구의 보수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세속 진영의 제도적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감소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럼에도 대도시 유권자와 젊은층, 학계·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세속주의 가치 옹호 세력은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 진영은 장기 집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헌법 개정(대통령 임기 등)과 종교 가치의 공적 영역 확대(성소수자·주류 규제 이슈 등)를 추진하고 있어, 개별 사건마다 터키 사회의 두 진영 간 극심한 대립과 동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의 4선 도전 시나리오와 국제정치학적 의미
1. 에르도안의 '4선 연임' 구상과 이마모을루의 부상
2023년 5월 대선 승리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8년까지 집권이 보장되었으나, 현행 헌법상 “대통령 2연임 제한” 조항에 따라 차기 출마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집권 연장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며, 측근들과 연합하여 2028년 대선에서의 4선 연임을 위한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그 핵심 시나리오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 제한을 없애거나 완화하는 것으로, 이미 집권 AKP와 연합정당 MHP 내에서 개헌 논의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본인도 2024년 신년 연설 등에서 “헌법을 시대에 맞게 고치자”고 언급하며, 집권 3기를 “터키 공화국 2세기의 개막”으로 규정해 사실상 2028년 이후까지 통치 구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하지만 의회 의석수 부족이 큰 걸림돌입니다. 개헌 국민투표를 발의하려면 의회 5분의 3 이상(360석)이 필요한데, 현재 에르도안 연립(AKP-MHP 등)은 323석으로 미달입니다. 이에 에르도안은 의회 내 제3당인 친(親)쿠르드 계열 '균등민주당(DEM)'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2023년 총선 직후 HDP가 당명 변경한 DEM당은 61석을 보유, 캐스팅보터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측은 “쿠르드 문제 해결”이라는 당근을 통해 DEM당의 협조를 얻는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수감 중인 쿠르디스탄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과의 대화 재개나 쿠르드어 교육권 일부 허용 같은 파격적 양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개헌 표결 지지를 얻는 방안입니다. 다만 쿠르드 이슈는 터키 사회의 최민감 현안이라 작은 양보에도 민족주의 진영 반발이나 돌발 테러 등 변수가 많아 에르도안 계획의 큰 도박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한편 현 헌법상 대통령이 조기 선거를 실시하면 임기 제한을 넘어 추가로 출마할 수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도 하나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르도안은 2023년 선거도 의회 조기해산을 통해 3번째 출마를 정당화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2027년경 의회를 해산하고 대선을 앞당겨 출마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2번째 임기 내 조기선거”로 간주하게 하는 전략도 거론됩니다. 이는 개헌보다 정치적 저항이 적을 수 있으나 경제 상황이나 여론 추이에 따라 시점을 저울질해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에르도안으로서는 개헌을 통한 임기제한 철폐(영구 집권 기반)를 선호하지만, 어려울 경우 차선책으로 조기선거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야권의 상황을 보면 2023년 대선 패배 후 지도부 교체 등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는 대선 당시 야권 후보인 클르츠다로울루를 적극 지원하며 존재감을 키웠고, 선거 후에는 CHP 내부 개혁을 주도하며 차세대 대선 후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마모을루는 현재 학사 학위 문제와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만약 이마모을루가 무사히 출마 자격을 유지한다면 2028년 대선은 사실상 에르도안 vs. 이마모을루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2002년 이래 처음으로 ‘에르도안 체제 vs. 대안 세대’의 본격 경쟁이라는 점에서 터키 내부정치에 일대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2. 시나리오별 국내 정치적 의미
① 에르도안 4선 연임에 성공할 경우: 만약 에르도안이 헌법을 고쳐 2028년에도 출마·당선된다면, 그는 사실상 종신집권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2003년 총리 취임 이후 25년 넘게 권력을 잡는 것으로, 터키 역사상 최장기 집권 지도자로 기록될 것입니다. 국내 정치적으로 이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체제의 공고화를 의미합니다. 이미 2017년 이후 입법·사법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추가 연임은 남은 견제 장치마저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야권과 시민사회는 “사실상의 독재”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정치적 탄압은 더 심해져 야당 인사 투옥, 표현의 자유 위축이 지속될 전망입니다. 또한 정파 갈등의 폭력화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예컨대 쿠르드계와의 협상이 틀어지거나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4선 에르도안 정권 하에서 사회 불안과 급진화가 우려됩니다.
에르도안이 장기집권에 성공하면 AKP 내부 권력투쟁은 거의 종식되고, 에르도안 개인에 절대 충성하는 체제가 굳어질 것입니다. 이는 단기적으로 정책 결정의 일관성을 가져올 수 있으나, 의사결정의 폐쇄성과 실책 발생시 교정 어려움이라는 부작용이 따릅니다. 경제 정책에서도 인기영합적 행보(저금리 고집 등)가 제어 없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구조개혁 지연과 외자 이탈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한편 에르도안은 보수 이슬람 지지층 결속을 위해 사회 보수적 의제(가족법 개정, 성소수자 탄압, 종교교육 확대 등)를 더욱 강하게 추진할 수 있습니다. 이는 터키 사회의 세속 대 보수 갈등을 장기화·고착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② 에르도안 4선 시도가 실패할 경우: 두 가지 실패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헌 또는 조기선거 전략 자체가 무산되어 에르도안이 어쩔 수 없이 2028년에 퇴진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출마했지만 야권 후보에게 패배하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 에르도안이 스스로 물러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여당 내 후계자나 친인척(가령 사위 알바이라크 전 재무장관)을 내세워 “푸틴-메드베데프식” 섭정을 시도할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에르도안 본인이 퇴장하면 AKP의 구심력 약화와 함께 야권이 정권을 잡을 확률이 높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두 번째 경우인 야권의 승리는 곧 이마모을루 등 세대교체 지도자의 집권을 뜻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터키 국내정치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CHP-İYİ당-친쿠르드 진보세력의 연립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은 공통으로 의회중심주의 회복, 사법 독립, 권력분립 재확립 등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법을 다시 손봐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에르도안 집권기 제정된 각종 제한적 법률(언론법, NGO 규제법 등)을 폐지하며, 다원주의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회복 조치들은 서방 세계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이고, 터키의 국제적 위상도 개선될 전망입니다. 다만 기대만큼 현실이 따라줄지는 미지수입니다. 야권 정부가 들어서면 에르도안 시대에 임명된 수많은 관료들의 비협조나, 친에르도안 세력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극단주의 단체나 일부 군경 내 강경파가 혼란을 틈타 새로운 쿠데타나 폭력사태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2016년의 트라우마가 커서 재차 쿠데타를 시도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또한 야권이 승리해도 이마모을루 개인이 대통령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CHP를 비롯한 야권 연합은 2023년 대선에서 후보 조율 실패와 과도한 연정으로 혼선을 빚었습니다. 2028년에도 앙카라 시장 만수르 야바쉬 등 경쟁자들이 존재하고,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결선투표에서 야권 표 결집이 변수입니다. 이마모을루는 비교적 개혁·온건 이미지로 폭넓은 지지가 가능하나, 일부 보수층의 반감(이스탄불 정권 뺏긴 데 대한 원한)도 있어 완승을 장담하기는 이르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모을루 혹은 야권 후보의 승리 자체가 주는 상징성과 파급력은 큽니다. 터키의 민주주의가 건재함을 입증하고, 헌정사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라는 획을 긋게 됩니다. 요약하면, 에르도안 4선 성공 vs. 실패는 터키의 국내 정치 미래를 완전히 달리하는 두 갈림길입니다. 성공 시에는 에르도안 1인 통치 체제의 장기 지속으로 신(新)권위주의 국가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고, 실패 시에는 터키 민주주의의 재도약과 함께 새로운 정치 세력 교체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3. 터키 정권 교체의 국제정치학적 함의 : 에르도안 vs. 이마모을루 외교 노선 비교
터키의 향후 국제관계 방향도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일 전망입니다. 에르도안의 외교 성향은 지난 20년간 상당히 일관되면서도 실용적으로 변모해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에르도안은 터키의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하여, 나토(NATO) 동맹의 일원이면서도 러시아·중국 등 비서방 국가들과도 협력하는 다변화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터키를 이슬람 세계와 튀르크권의 맹주로 자리매김하려는 신오스만주의적 비전을 제시하며 중동 분쟁과 아프리카 개발 등에 적극 개입했습니다. 예컨대,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과 결을 달리해 쿠르드 YPG를 공격했고, 러시아산 S-400 방공미사일 도입으로 미·터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를 돕고 흑해 곡물협정을 중재하는 등 서방과의 협력도 병행했습니다. 요컨대 에르도안은 “동맹이지만 제갈길을 가는” 독자 노선으로 터키의 지정학적 입지를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EU 가입 협상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인권 문제로 서방과 갈등이 누적되어 서구 여론에서 터키의 이미지가 손상되었습니다.
반면 이마모을루와 야권의 외교관은 전통적인 서방 동맹 회복과 실용주의를 강조합니다. 야권 공동정책 2300조항에는 “국제법 준수, 이념이 아닌 국가이익에 따른 외교”와 함께 “서방과의 신뢰 회복”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에르도안 정권 하 터키의 외교적 일탈을 교정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CHP를 비롯한 야권은 원래 케말 아타튀르크 이래 서구 지향 외교를 선호해왔습니다. 이마모을루 역시 EU 회원국 및 미국과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며, 시장 재직 시절 해외 순방에서 “민주적 터키의 투자 환경”을 어필해 서방 자본 유치를 도모했습니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야권이 집권해도 러시아와의 경제·에너지 협력은 현실적으로 유지할 것이나, 국방 분야에서는 러시아산 무기 도입 같은 협력은 중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가관 측면에서 에르도안과 이마모을루의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신앙과 민족을 앞세운 독자강국 노선” vs. “세속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협력외교 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르도안은 터키를 “자주적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크고, 이를 위해 국내 단결(종교·민족주의)과 군사력 강화를 중시해왔습니다. 이마모을루 등 야권은 터키를 “유럽적 민주국가”로 정체화하며, 법치와 인권을 중시하는 국제사회 일원이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외행동으로 표출되어, 에르도안은 때때로 반서방 민족주의 선동을 활용해왔지만, 야권 지도자들은 서방과의 신뢰 회복과 경제협력 증진을 우선순위에 둘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4선 성공 시, 국제사회는 사실상 30년 가까이 집권하는 터키 지도자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일각에서 “제2의 푸틴” 등장으로 간주되어 서방의 견제가 심화될 수 있습니다. 미국과 EU는 터키를 민주 동맹이라기보다는 실리적 파트너로 더욱 취급하게 될 것이고, 터키의 NATO 내 영향력도 미묘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에르도안이 반미·반EU 언사를 강화하거나 중러와 밀착할 경우, 서방은 터키를 전략적으로 띄워주기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고립시키려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흑해 및 중동 관문)은 변함없기에, 완전한 결별보다는 냉혹한 거래관계(Transactional Relationship)가 지속될 전망입니다. 예컨대 미·EU는 안보이익을 위해 터키와 협력하되, 인권이나 민주주의 문제 제기는 포기하거나 낮추는 식으로 현실적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는 브릭스(BRICS)나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비서방 틀에서 활로를 찾으려 할 것이고, 러시아·중국도 터키를 자기 진영으로 포섭하기 위해 경제적 혜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중동 맥락에서도 에르도안의 터키는 이슬람 보수 진영의 맹주 지위를 계속 주장하며 이란, 사우디 등과 경쟁적 협력을 펼칠 것입니다.
한편, 에르도안 4선 시도 실패 및 야권 집권 시, 국제사회는 이를 터키 민주주의의 복귀로 간주하고 환영할 공산이 큽니다. EU도 터키-EU 관세동맹 업그레이드 협상을 재개하고, 인권 개선 조치를 조건으로 비자 면제 협의 등에 나설 수 있습니다. 나토 차원에서는 터키가 다시금 서방 안보체제의 핵심 일원으로 활동하게 될 전망입니다. 이는 러시아에 심각한 전략적 손실로, 푸틴 행정부는 터키의 서방회귀를 막기 위해 에너지 가격 인하나 시리아 영토 양보 등의 제안을 할 수도 있지만, 새 터키 정부가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선 터키의 이미지가 개선되어, 아랍의 봄 이후 냉랭했던 이집트 등과도 관계 정상화가 더 진전될 것입니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선 터키의 이미지가 개선되어, 아랍의 봄 이후 냉랭했던 이집트 등과도 관계 정상화가 더 진전될 것입니다. 이마모을루 등 새 지도자는 “내정 불간섭”을 강조하고 친(親)무슬림형제단 색채를 배제함으로써, 아랍 왕정들과 건설적 관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CHP는 전통적으로 원만했기에, 현재 진행중인 관계 개선이 가속화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야권 집권 시에도 해결이 어려운 과제들이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 400만 명에 달하는 문제, 쿠르드 분쟁 해소, 터키 경제 구조적 취약 등은 정권 교체만으로 마법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도기적 혼란 속에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국제사회는 터키 야권 정부를 도와주려 하겠지만, 터키 유권자의 인내심과 새 정부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를 것입니다. 만일 야권이 실망을 안겨 5년 만에 다시 무너진다면, 그것은 터키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타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권 정부로의 이양이 이루어진다면, 서방과 국제기구는 터키의 안정적 민주 전환을 위해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결론적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향후 행보와 이마모을루 시장 등의 부상은 터키의 국내 정치 지형뿐 아니라 국제 전략 환경에도 중대한 파급효과를 가질 것입니다. 에르도안 4선 개헌 강행 여부는 터키 민주주의의 생사를 가를 분수령이며, 이마모을루의 정치적 운명은 야권의 명운을 좌우할 변수입니다. 양자의 외교노선 차이는 터키의 동맹 지위와 지역세력 역할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터키는 향후 몇 년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21세기 중반 터키의 정체성 – “서구식 민주국가” vs. “신흥 권위주의 강국” – 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사회와 주변국들도 이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각자 대비책과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결국 터키 유권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의 결정이 국내의 화해와 개혁, 그리고 국제무대에서의 터키 위상 재정립을 이끌어낼지, 혹은 내부 갈등과 외교적 고립 심화로 이어질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 Turkey’s next leader may be pro-West but not anti-Russia | CHATHAM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