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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 인본주의, 인권의 차이

Humanitarianism, Humanism, Human Rights

by 삼중전공생 Mar 28. 2025

인도주의(Humanitarianism)와 인본주의(Humanism)의 차이


인도주의는 재난, 전쟁, 빈곤 등에 빠진 사람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무 조건 없이' 돕는 겁니다. 그렇지만 인도주의는 기본적으로 행위자의 '의도' 보다는 '행동'에 더 방점을 찍습니다. 설령 그 의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구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제했다면 그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선행입니다.


반면 인본주의는 '사람을 돕자'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상입니다. 서양사를 기준으로 중세 시대에는 사람보다 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신을 상정하지 않는' 세계관을 만들어갔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인간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되살린 겁니다. 동물권이나 환경윤리와 관련해서 이 인본주의가 비판을 받는 이유도 이것이 '인간만' 최고로 중요하다는 취지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Humanism)와 인권(Human Rights)의 관련성


인권 개념은 인본주의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중요한 것인지  따지다 보니 인권 개념을 발명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천부 인권이든, 인간의 자율성에 근거지어진 도덕철학적 인권이든,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실정법'으로는 양도하거나 박탈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가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인도주의(Humanitarianism)와 인권(Human Rights)의 차이


인도주의는 말 그대로 불우한 이웃을 조건 없이 '돕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도우면 좋지만, 돕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인도주의적으로 누군가를 도우면, 그 사람은 '마땅히' 나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도덕적 비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그에게 준 도움은 나의 선한 의지 때문이지, 내가 그를 도와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권은 기본적으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입니다. 만약 내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남에게 당당히 내 인권을 보장하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나의 당연한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권을 보장해준 사람에게 딱히 고마워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의무 교육인 초등학교를 공짜로 다니면서 대한민국의 고소득층 부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빈민들이 '인권'이 있고 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구호 활동을 펼치는 것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들을 도와야 할 마땅한 '도덕적, 자연법적 의무'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선진국 시민들이 세금으로 아프리카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 때문에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지, 기분 좋은 자선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빈민들을 대상으로 구호 활동을 펼치는 것이 '인도주의'적 차원이라면, 그들은 선진국 시민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또 이 구호 활동은 순전히 선진국 시민들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구호 활동은 중단될 수 있고, 아프리카 빈민들은 이것을 비난할 도덕적 자격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원은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불평등한 종속 관계'를 만듭니다.




왜 인권(Human Rights)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지원(humanitarian aid)이라고 하는 가


인권은 자연법적 권리입니다. 정상적인 민주 국가는 방대한 인권의 일부만 떼와 구체화시켜 헌법에 적는데, 그것이 기본권입니다. 따라서 기본권은 시민이 자신이 국적을 가진 주권 국가에 대해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반면 인권은 누구에게 보장을 요구해야 할 지 주체가 모호합니다. 내가 정글에서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려고 가마솥에 들어가 있는데, "내 인권을 보장하쇼"라고 얘기해봤자 더 빨리 잡아먹힐 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권은 기본적으로 보장 주체가 불분명합니다. 앞서 든 예시는 아프리카 빈민들의 인권을 선진국의 시민들이 보장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전제 하에 유효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권은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자연법 사상'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선진국 시민들이 지구상 누군가의 불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일도 아닙니다. '국제 구호의 의무'를 정당화하려는 많은 철학적 시도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닌 상황입니다.


그러니 '인도주의'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도주의는 "철학적 정당화?,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당장 눈 앞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돕고 보자"는 식의 행동주의적 개념입니다.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불평등한 종속 관계를 양산한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선진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예방주사를 맞지 않거나, 깨끗한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만약 세계 정부가 수립되고 인간의 인권이라는 것이 세부적인 조문으로 성문화된다면, 그때는 아프리카 빈민들은 세계 정부에게 자신들의 인권이 침해되었으니 행정력을 투입해서 즉각 구제해달라고 각종 행정 소송이나 헌법 소원 심판을 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이상, 아프리카 빈민들은 오로지 선진국 시민들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 그렇다고 트럼프가 USAID를 해체한 것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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