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시간감각
엄마, 내 친구 H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청소는 하루에 한 번만 하고.' 그러는 거 있지.
집에 있으면 하루에 청소 여러 번 할 수 있는 시간이 나는 줄 아나 봐.
이 말을 하고서 나는 엄마와 함께 깔깔거리고 웃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다. 정말로. 믿지 못하겠지만 그러하다. 하루에 두 번 청소할 시간 따위 없다. 나는 물걸레질까지 하는 청소는 일주일에 한두 번 하고, 집 전체를 청소기 돌리는 건 이틀에 한 번 한다. 물론 침실은 매일 로봇 청소기를 돌린다. 하루에 두 번씩 청소를 하지 않아도 전업주부는 충분히 바쁘다. 어느 정도로 바쁘냐고?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처음에 가장 놀랐던 점은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업주부가 되기 전에는 초등학교 특수학급 담임교사였다. 여덟 시 반까지 출근하고 아홉 시부터 수업이 시작하면 점심 먹을 때까지는 무려 4교시의 수업을 한 후였다. 오전 동안 국어도 가르치고 수학도 가르치고, 아이들이랑 놀기도 하고 등등 정말 많을 일을 하고 나서 허기가 지면 점심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 먹을 때가 되었는데도 뭔가 제대로 한 일이 없는 날이 허다하다.
시간 대비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더 억울한 건 나는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이, 차 한잔 마실 여유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는데, 아직도 집안일은 남아있고, 아이가 곧 집에 올 시간이라는 것이다. 바쁜 직장인이었다가 전업주부가 된 직후라면 반복되는 이 상황 때문에 우울증이 오기 십상이다. 전업주부가 되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느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 전업주부를 시작했던 목적은 잊어버리고 금세 다시 직장인이 된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어느 주말 아침, 내가 아이와 함께 외출하고 남편만 혼자 집에 남았다. 남편은 우리가 집을 비운 서너 시간 동안 집안일을 해놓겠다고 했다. 서너 시간 만에 다시 들어와 보니 남편은 골이 나 있었다. 내가 "왜 화났어?"라고 물었더니 이것도 해놓고 저것도 해놓고, 다 해놓으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거였다. 강아지 산책을 다녀오고 나니 시간이 별로 없어서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원래 집에 있으면 시간이 그렇게 가. 아무것도 다 한 게 없는 게 정상이야."
전업주부가 되면 일상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시간이 이렇게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거였어? 시간이 이렇게 후딱 가버리는 거였어? 매번 겪으면서도 다시 놀란다. 특히 아이가 등원하고 나서 점심 먹을 때까지의 시간은 다른 시간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흐른다. 아이가 하원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세네 배로 주욱 늘어나는 느낌이다. 아이랑 열심히 놀다가 한 삼십 분 지났나 하고 시계를 봤는데 오 분밖에 안 지나있고. 이런 이상한 시간 감각을 갖게 된다.
전업주부는 좋다. 정말 좋다. 에너지를 아껴두었다가 아이와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고, 보금자리를 내 손으로 가꾸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즐겁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의 이런 큰 장점 때문에 이상한 시간 감각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억지로나마 적응하게 되었다. 가만히 따져 보면 사실 스트레스받을 것도 없다. 무엇을 못 해 놓았다고 타박하는 직장 상사도 없고, 눈치를 봐야 할 동료도 없다. 다만 내가 나의 감독관일 뿐이다. 내가 나에게 꽤 엄격한 감독관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발견한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이거였다.)
결혼 전에 대학원을 다녔었는데, 그때의 시간감각이 전업주부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루종일 자율성이 주어지고, 그 시간을 운용하는 건 오롯이 내 책임이다. 게다가 하루종일 고민하고 고군분투하고 전혀 쉬지 못했는데 뭐 하나 한 거 없는 느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드는 게 흡사하다. 내가 전업주부의 시간감각과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에 그나마 수월하게 적응한 건 대학원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시 어떤 경험이든 인생에 플러스가 되나 보다. 심지어 대학원일지라도.
전업주부 7년 차. 지금은 그런 스트레스 관리쯤이야 수월한 베테랑이다. 전업주부가 되기 전의 나는 나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너무 고되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이런 편안한 마음이 있어야 전업주부를 계속할 수 있다. 뼛속부터 부지런한 빨리빨리 한민족의 후예 중 한 명으로서, 스스로에게 조금은 관대하고 유연한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 그동안 참 고생 많았음을 고백해 본다. 아마 전업주부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 갖지 못했을 그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