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게 알아낸 게 있다면 그것을 잘 써먹는 일 또한 중요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영연은 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네, 식사 감사합니다. 맛있었어요.”
“그래, 잘 먹어줘서 내가 더 고맙지.”
어깨로 문을 밀고 나가려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활짝 열어주니 싱긋 미소를 보이고 회관 밖으로 나가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급해보인다. 후다닥 멀어지는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긴, 말해버린 건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더 많은 말을 해서 이전에 했던 말을 가리려고 하는 행동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차피 뻔히 후회할 일을 왜 하는 거지?
옆집에서 자꾸 벌레가 나오는 듯한데, 예전에 그 집에서 살았던 사람과 더 이상 연락되지 않아서 답답하다, 연락이 된다면 귀찮아도 내가 정리할 수 있는데, 그거 하나 못해서 짜증난다, 아무리 사람 안 사는 집이라고 해도 옆집에 피해 안 가게 정돈해야 하는 거 아니냐...
거기까지 말한 그는 결국 입을 다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어쨌거나 나에겐 좋은 일이다.
배부르고 날씨도 덥지 않은 게 이대로 누우면 밤새 못 잤던 잠에 들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미윤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아주 잘 알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와 손가락 끝까지 저릿거리는 감각은 분명 편안한 휴식을 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대로 누워봤자 잠은 절대 오지 않을 거다.
지긋지긋하다 못해 이젠 내 상태를 직접 파악하기까지 이르렀다. 누워봤자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더욱 피곤해지기만 한다는 걸 알기에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볍게 마을 둘러보고 오자. 산책하자는 기분으로.
마을 회관을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맞은편에 있는 영연의 집이다. 가운데 자리 잡은 길이 넓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워낙 담벼락이 낮은 탓에 멀리서도 얼추 추측은 가능하다.
얼핏 봐도 잘 다듬어진 잔디. 평소 희운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람을 부르지 않고 직접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예상을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는 듯 빈 개집 옆엔 직접 마당 잔디를 가꿀 때 사용하는 잔디깎이가 놓여 있다. 원래 이 집도 개를 키웠던가?
마을 입구 가까이에 자리한 집이기 때문에 벌레가 자꾸 나온다는 옆집은 바로 왼쪽에 보였는데, 영연의 말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벌레가 나올 곳이라고는 옆집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이해된다.
길 건너로 굳이 가고 싶진 않았다. 밥을 먹지 못했다면 모를까, 가까이 갔다가 혹시라도 집주인들이 보면 들어오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색하게 앉아서 도대체 언제 사왔는지 모를 믹스커피를 마시고 싶진 않았다.
마을 회관 바로 옆엔 ‘연못 수퍼’라고 써진 간판이 빛바랜 채 달린 건물이 보였다. 이 건물이 원래 슈퍼였나? 가물가물해진 기억 속을 더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안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파란색 방수천으로 건물의 절반 정도 덮인 모습이 여름 아침에 봐도 을씨년스럽다. 유리창은 다 깨져있었고, 아침햇살 때문에 보이는 안쪽은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한때는 안을 채우고 있었을 판매 물건은 전부 사라졌고, 텅 빈 매대만 바닥에서 솟아난 듯 서 있었다. 뽀얗게 앉은 먼지 위로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혀 있다. 누군가 왔다 간 모양인데, 그 발자국 위에도 다시 먼지가 쌓여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람이 오고 갔다는 흔적이 지워질 듯했다.
일부가 움푹 들어간 노란 주전자와 사용감이 넘치는 막걸리잔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현금통이 열린 포스기 안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누군가 버리고 간 영수증, 먹다 버린 과자 봉투와 왜 있는지 모를 바람 빠진 축구공, 빈 술병 등등.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보이는 게 그 정도였다.
그나저나 방수천은 왜 절반만 덮여있을까?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 때문에 옆으로 밀려난 듯했다. 즉, 천이 밀려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덮어주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멀찌감치 서서 고개를 빼고 닫힌 슈퍼 안을 살피던 미윤은 발걸음을 돌렸다. 보기만 해도 먼지가 묻어날 듯해서 불쾌했다.
바로 옆엔 빈 상가가 있었다. 두 개의 층을 가진 건물이자, 연못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상가 역시 오랜 시간 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자전거를 묶어놓을 때 쓰는 긴 자물쇠로 칭칭 감겨 있다. 열쇠 넣는 구멍이 붉게 녹 쓸어서 문을 열기 위해 자물쇠를 여는 건 어려워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있다고 해도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잘 걸어가던 미윤이 우뚝 멈춰섰다.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에서 물냄새가 났다. 그대로 직진하면 연못이 나온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마르지 않는 연못. 그리고 근처엔 예전에 살던 집이 있다. 내 집. 죽어버린 부모가 나에게 물려준 집.
연못이 있는 방향을 빤히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희운과 영연이 사는 집 근처엔 빈집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다른 하나는 마당에 풀이 없는 집이다.
거기 살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다른 곳은 대부분 잔디가 자라는 상태로 놔둔 것과 다르게 그 집 마당은 시멘트가 깔려있다.
나는 그 집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도 담벼락이 낮았다. 고작 허리까지 오는 높이라서 상체를 들이밀지 않아도 안이 다 보인다. 아마도 처음엔 깔끔하게 마감했을 시멘트는 더 이상 보정해주지 않아서 갈라지고 틈새로 잡초들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 해가 내리쬐면 열기를 그대로 흡수해서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빈집의 온도만 더 높게 느껴졌다.
집은 전체적으로 멀쩡했지만, 문이 없었다. 망가진 건지, 일부러 떼어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집안 거실이 다 보였는데, 굳이 남의 집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진 않았다.
미윤이 의문을 가지는 건 담벼락 높이였다. 아직 연못 마을의 모든 집을 살펴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집만 생각하면 도대체 담벼락이 왜 세워져 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낮고, 안이 다 보였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일단 마을 내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고,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발견됐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는 절대 없다. 죽은 사람이 늦게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면 당연히 무서움을 느끼는 게 맞지 않나?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다들 담벼락을 높게 올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있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담벼락이 높아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죽은 이후라도 썩어 문드러진 모습을 보이기는 싫을 거다.
만약 미윤의 부모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로 밝혀졌다고 해도, 연못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믿자, 외지인의 소행이지 우리 마을에선 사람을 죽일만한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담벼락을 높이지 말자고 했을 거다. 무식하긴.
어쨌거나 부모님의 자살은 마을 사람들에게 다른 집 사정에 간섭할 이유를 충분하게 만들어 주었을 거다. 안 그래도 서로서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 부모님의 자살은 다른 집 밥상 위에 올라오는 수저 모양까지 지적할 수 있게 만들었겠지.
아마도 그런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이사 간 사람도 있을 거다. 적당히를 모르고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려고 하는데, 마음 편하게 물 한 잔도 못 마시겠지. 뻔했다. 보지 못했고 볼 생각도 없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상상만 해도 징글징글하네. 미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마당에 시멘트 깔린 집 뒤로 걸어갔다. 거기엔 현은이 혼자 사는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