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by 이홍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려한 이층집. 현은의 부모님은 연못 마을에서 입지가 큰 사람들이었다. 돈이라면 돈, 땅이라면 땅, 부족할 것 하나 없이 살아온 사람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장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큰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 부부였다. 지금은 아마 그 공장지대가 없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해서 마을을 잠시 떠났던 현은은 남편과 이혼 후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이유는 남편이 현은과 친하게 지내던 직장동료와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당시엔 그런 일로 여자가 욕을 먹었다. 얼마나 남편에게 잘해주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내의 직장동료와 바람이 나겠느냐고.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데, 평소에 어떻게 했길래 바람이 나냐고.

연못 마을에 사는 사람 중 이혼하고 돌아온 현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잘 돌아왔다, 고생 많았다 위로해주고, 바람피운 남편과 직장동료를 끊임없이 욕했다. 그 뒤엔 현은의 부모님이 있었다.

이혼하고 돌아온 딸을 아무런 말 없이 받아주고, 품어주니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현은의 아버지가 전 사위의 직장까지 찾아가 난장판을 피우고 왔다더라.

그러니 앞에선 무조건 잘해주는 게 답이었다. 현은의 부모가 가진 힘이 있으니, 작은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가려면 눈치를 보는 게 최선이었다.

당시 어렸던 미윤은 마을 사람들이 몰래 현은을 욕하고 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크게 신경 쓰진 않았는데, 앞에서 잘해준다고 해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현은이 어리석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사람은 처음 잡히는 이미지라는 게 중요하다. 그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딱 한 번 했을 뿐인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생각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늘은 그저 마을을 둘러보기만 할 예정이었다. 찾아가서 말 거는 일도 귀찮지만, 슈퍼 건물이 방수천에 절반만 덮인 채 방치된 걸 보면 미윤이 알고 있던 연못 마을과 지금의 연못 마을이 많이 다르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이깟 마을, 그냥 밀어버리고 보상금 챙겨 나가자는 설득을 하려고 해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다. 게다가 현은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이 이혼하고 돌아온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마을에 대한 애착도는 임순희 어르신 못지 않을 걸로 예상된다.

처음부터 힘 뺄 필욘 없다. 오늘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누가 좋을까? 하여간 현은은 아니었다.

걸음을 옮긴 것도 내 집을 마주하고 싶지 않단 마음인 거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예상에 없었다. 하지만 현은이 이른 새벽에 일어난다는 사실과 아침마다 이 층 베란다에 나와 빨래를 널고 있다는 사실은 예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어머, 미윤이 아니니?”

나는 잘못된 행동을 하려다가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손에 젖은 수건을 들고 있는 현은은 긴가민가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내가 인사를 하자 반갑게 웃는다. 사실 반가운 사이도 아니면서.

안다. 타인을 대할 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는 걸. 반갑지 않아도 반가운 척하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도 억지로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차피 몇몇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들으면 기분 나쁠 만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사실이다. 잘 보이겠다고 말을 꾸며봤자 내가 연못 마을까지 내려온 목적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기왕이면 영연처럼 뜻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는데.

엉뚱한 사람이 걸려버렸다. 내 표정이 구겨지거나 말거나 손에 든 수건을 대충 털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현은.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린다는 걸 깨달은 미윤은 새삼 연못 마을에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빠져나갔는지 느꼈다.

서울에선 이제 막 출근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여기선 밥 차려 먹은 후, 집안일을 끝내고 앉아서 가벼운 간식을 즐기는 시간이다.

요즘 같은 계절이면 골목 구석구석에서 옥수수 찌는 단내가 빠지지 않았다.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 있냐고 한 소쿠리 삶아서 아예 마을 회관에 깔아놓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단내는커녕 집으로 들어와도 된단 말이 과장 조금 보태서 시내까지 닿게 생겼다.

미윤이 아니라고 거절할 틈도 없이 수건을 널어버린 현은은 집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서 주춤거리기만 할 순 없었다.

밤새 잠들지 못한 탓에 정수리에 묵직하게 얹어진 피로 위로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앉았다. 이대로 무시하고 가버리면 저 여자가 무슨 말을 떠들어댈지 모른다. 물어보지 않아도 도로 공사하는 걸 반대할 게 뻔한데, 여기서 책잡혔다가 공사를 찬성하는 쪽에서 말 꺼내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대문은 열려 있다. 누가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듯. 낮은 담벼락을 보고 이미 경악한 뒤였지만, 손으로 밀 필요도 없이 활짝 열린 문을 보고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친다. 경계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사생활을 지키고 싶었을 누군가는 얼마나 마을을 뛰쳐나가고 싶었을까.

현은의 집은 마을의 다른 집보다 크다. 일단 집을 이루고 있는 땅이 연못 마을 일반 가구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인다. 거기다가 어린아이가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넓은 마당은 한눈에 둘러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방금 전까지 집주인이 빨래를 널고 있던 베란다 바로 아래에 거실이 있는데, 원하는 만큼 열고 닫을 수 있는 통유리로 되어 있다. 툭 튀어나온 베란다가 만드는 그늘 아래 차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비가 오는 때를 대비해 긴 손잡이를 돌려서 이용하는 그늘막이 접혀 있다.

마당이 워낙 넓은 탓인지, 그 외에 눈에 띄게 보이는 게 없는 탓인지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졌다는 느낌보단 텅 비어서 서늘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담벼락 가까이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천에 덮여있는 게 보인다. 다리가 길고 윗부분이 동그란 반원 모양인 걸 보면 아마도 바비큐 기계 같은 게 아닐까?

대문부터 현관까지 돌로 모양을 냈지만, 여름 햇살을 받으며 자라는 잔디에 거의 가려져 있다. 습기가 없는 정도가 심해 발목에 잔디가 스칠 때마다 따끔거린다. 잘못 스치면 깊게 베일 듯하다.

이 층에서 내려온 집주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활짝 연다. 현관문 역시 닫혀있지 않았는지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쩐지 질리는 느낌. 마침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살 핑계를 대며 인상을 확 찡그린 채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래. 아침은 먹었니?”

“네. 이장님 댁에서 챙겨주셨어요.”

“아휴, 다행이다. 안 그래도 먹을 걸 조금이라도 챙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응, 영연이 둔한 면은 있어도 이렇게 사람 챙기는 건 똑부러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집안 공기는 춥다고 느껴질 정도다. 현은도 그렇게 느끼는지 계절감에 맞지 않는 겉옷을 걸치고 있다.

디자인이 촌스럽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생활감은 제법 있다. 현관을 열면 바로 거실이 보이는 구조가 아닌 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꺾인 복도를 걸어가야 통유리창이 설치된 공간이 나온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벽처럼 세워두고 그 뒤엔 부엌이 있다. 소파는 ㄱ자로 꺾인 형태인데, 한쪽은 통유리창 밖을 향해 있고, 다른 한쪽은 올라가는 계단을 등지도록 되어 있다.

벽걸이형 티브이는 전자제품에 관심 없는 사람도 모델명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광고를 많이 내는 대기업의 최신 모델이다. 하지만 그 밑으로 줄줄 늘어진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는 집 전체의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있다.

사방에 끈이 널려 있고, 접힌 박스와 물건이 가득 담겨서 윗부분이 제대로 잠기지 않는 박스가 뒤엉켜있다. 이사 가나?

“거기 앉아 있어, 커피라도 내줄게. 혹시 아메리카노도 마시니?”

“네.”

“아휴, 저번에 어디였지, 그... 시내에 있는 미용실 사장이 좋은 커피 머신 두 대가 생겼다면서 하나 주겠다고 해가지고. 그런데 내가 커피도 잘 안 마시고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더니, 자기는 어차피 두 대 전부 쓰지도 못하고, 팔기엔 아까우니까 제발 가져가라고 하더라.”

“아... 네.”

“내가 원래는 커피맛을 잘 몰랐거든? 그런데 세상에 이거 생기고 나니까 커피향이나 맛이 다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니까.”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는 아쉽게도 현은의 목소리를 없애주지 못했다. 원두가 갈리면서 풍기는 고소한 향을 맡고 있자니 거절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온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그것은 금방 깨져버릴 착각이었다.

커피 내려오는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성격 급한 집주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그런데 미윤이 너, 혹시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 그 서울 여자들한테 팔고 돈 받으려고 여기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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