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by 이홍

현은의 이야기


나는 정말 생각할수록 울분이 터진다니까. 솔직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 요즘 같은 시대에 타인한테 행하기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 그런데 그걸 우리 마을은 한다? 세상에 이런 좋은 곳이 어디 있니.

게다가 순희 어르신 정정하신 거 봐. 태어난 년도도 기억 못하시는 분이 지금도 걸어서 마을 회관까지 직접 가시잖아. 서울 같은 데 가보면 나이는 젊은데, 뭐 하나라도 할 때마다 아프다고 타령하는 노인들 빽빽하잖아. 그게 다 건물 많고 차 많은 곳에서 살아서 그래.

미윤이 너도 알다시피 내가 또 이 마을에만 살았던 것은 아니잖니. 결혼... 아휴, 너는 그런 거 안 하고 살아서 편한 거야. 웬만하면 남자 만나지 말고 살어. 제대로 된 사람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 찾으려고 해도 한 세월은 걸린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혼자 사는 게 최고야.

어쨌든 연못 마을 나가서도 살아봤는데, 매 순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아니? 아침에 눈 뜨는 일도 쉽지 않고, 대중교통 이용한다고 해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꼼짝도 못하고 회사까지 가는 게 너무 힘들더라. 그렇다고 자가용 이용하면 좀 나아? 그것도 아니야. 도로인지 주차장인지, 꽉꽉 막혔어.

사방에서 빵빵거리지, 사고 나지, 모르는 사람이랑 엉겨 붙어 있어야 하지... 게다가 건물 많은 곳은 물이 안 좋아. 그래서 매번 물을 사 먹어야 한다니까?

정수기? 정수기 있지. 회사에 있긴 한데 거기에 뭐가 어떻게 들어갔을 줄 알고 마셔? 나는 맨날 물 사 마셨어. 그래도 물 사러 갈 때 슈퍼 가까이 있는 건 좋더라. 에휴, 그때는 편의점도 아니었어. 그냥 슈퍼지, 슈퍼.

여기 살 땐 새벽에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마을 떠나고 나니까 잠드는 것도 힘들고, 깨는 것도 힘들다니까.

악몽이었지. 예전엔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모르겠어. 모든 게 다 답답했다니까. 일하다가 나와서 숨이라도 고르려고 하면 매연 냄새가 지독해, 지독해. 맨날 콧물이 까맣고, 머리 감아도 까맣고, 몸을 씻어도 까맣고 그러더라니까.

음식은 하나 같이 맛없어가지고... 그땐 밖에 나가서 점심 먹었거든. 구내식당, 뭐 이런 건 큰 회사나 있는 거지, 오 층짜리 건물에 사무실 하나 임대해서 쓰는데 식당 같은 게 어디 있겠니? 예전엔 다 그랬어.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몇 없었거든. 나야 운이 좋은 셈이지.

나 땐 여자들 일하려면 다 공장 가고 그랬어. 우리 부모님이 공장 하셨잖아.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 대우를 어떻게 하는지 너무 잘 아는 거야. 일하는 건 좋은데, 할 거면 좋은 곳에서 하라고. 공장 일 같은 거 하면 절대 허락 안 할 거라고.

그래서 공부 무지하게 했지. 내가 부모 입장이었으면 딸이 얼마나 기특했을까 싶기도 해. 사실 나는 돈 같은 거 안 벌어도 충분히 먹고 살만 하거든. 지금도 봐. 마을로 돌아오고 난 다음부터 일 같은 건 하나도 안 했는데 잘 살고 있잖아. 하여간 기특했을 거야, 부모한테 기대지 않고 혼자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해보니까 나는 잘 모르겠더라. 내가 살면서 한 번도 공장에서 일한 적 없지만, 차라리 공장에서 일하는 게 나을 정도야. 그래도 우리 공장 있던 곳은 시내랑 가깝고, 거기는 음식이 맛있잖아.

내가 일하던 곳 근처는 영 아니더라니까. 죄다 밍밍하니... 니 맛도 아니고 네 맛도 아니라니까. 미윤이 너는 서울에 살면서 그런 거 못 느꼈니? 사람이 먹을 만한 걸 만들어 팔아야지, 이건 뭐 먹으라고 만든 건지, 뭔지.

간을 안 한 거 같아, 내가 볼 때는. 간을 하면 그런 맛이 날 수가 없다니까. 모르겠는 음식을 먹고 돈을 매번 내야 하니까 너무 아까운 거야. 그때 생각했다니까. 음식점 내려면 시험 같은 거 보고, 일정 점수 이상 얻은 사람만 가게 열 수 있게 나라에서 그런 거 좀 법으로 만들고 그래야 된다니까. 세상에, 얼마나 맛이 없었으면 지금 이 나이까지 기억하고 있겠어?

먹는 것도 시원찮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좀 별로였어. 다 싫었지, 뭘. 나는 내가 연못 마을을 떠나서 살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거든. 그놈의 결혼 때문에... 미쳤지, 미쳤어. 그땐 눈에 뭐가 껴가지고 그냥 밥 먹고 이에 낀 고춧가루 빼는 모습도 잘생겨보였다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를 좀 귀하게 키운 게 아니잖아. 남자친구 이런 건 사귀고 할 생각도 못했지. 그런 건 다 어른 되면 하는 줄 알았어. 어릴 때 누굴 만나봤어야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나는 뭘 모르니까 조금만 잘해줘도 좋다고 홀랑 넘어간 거야.

처음엔 잘해줬지. 지 딴엔 시골에 사는 여자 하나 데려다가 애 몇 명 낳아서 기르게 하고, 다른 여자 만나면서 살아보려고 했던 거 같아. 시골에 산다고 만만하게 본 거지. 안 그러면 도대체 이 구석진 마을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겠어? 무슨 연못 소문 듣고 왔다나, 뭐라나. 그걸 믿었으니...

그 남자 따라서 마을 떠나니까 풀리는 일도 없고, 몸도 너무 아프더라. 건물 많고 차 많은 곳에 살아서 그랬나? 이혼해버리고 다시 고향 오니까 아팠던 몸이 싹 나아버리는 거 있지?

우리 마을이 있는 자리가 목 좋은 자리라니까. 산 있고, 물 있고. 아픈 사람도 이런 곳에서 살면 다 나아. 병원 갈 필요가 없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도로 놓는 거 다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당장 석혁이네만 봐도 말이야...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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