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진정성, 기억의 언어
"자기소개서는 스펙이 아니라 기억이다"
“자기소개서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소서를 쓰다 보면 결국 말이 다 똑같아져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요?”
나는 인사담당자다.
채용 시즌이면 수십 장의 자기소개서를 읽는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글이라는 것.
사람은 스펙보다 장면으로 기억된다
자기소개서는 기술서가 아니다.
경험을 정리한 리포트도 아니다.
그건 결국 하나의 짧은 인생 이야기다.
그 사람의 태도, 시선,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 일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나는 그런 것들이 드러난 자기소개서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야간 배송 중 한 봉투가 찢어졌을 때, 저는 배송지 앞에서 15분을 멈췄습니다.”
“처음으로 고객에게 욕을 들었을 때, 저는 3초를 쉬고 다시 말했습니다.”
“회계법인 인턴십 마지막 날, 팀장님 책상 위에 제 사직서가 아닌 손 편지를 놓았습니다.”
이런 문장은 숫자가 없는데도 그 사람의 ‘결’과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래 남는다.
자기소개서는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는 문장이 아니다
많은 자기소개서가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라는 말에 갇힌다.
“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들은 소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런 감정도 남기지 않는다.
나는 면접장에 들어온 그 사람을 그런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 구체적인 한 장면으로 떠올리고 싶다.
“저는 책임감이 강합니다.”보다
“실수한 동료 대신 남아서 마감 보고서를 다시 썼습니다.”
이 문장이 훨씬 많은 걸 설명한다.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의 기억으로 각인된다.
자기소개서는 결국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의 정리여야 한다.
인사담당자는 기억을 듣는 사람이다
나는 면접에서 자소서를 다시 펼쳐본다.
거기서 중요한 건 ‘이 사람이 어떤 스펙을 쌓았는가’보다 ‘이 사람이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가’다.
기억은 감정이 담긴다.
그리고 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사담당자는 기억을 들어야 한다.
말로만 포장된 자소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나온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읽어야 한다.
때로는 문장이 아니라, 마음을 본다
한 신입 지원자의 자소서가 떠오른다.
오탈자도 있었고 문단 구성도 엉성했지만, 이 문장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비가 밀린 날, 저는 ‘일 배운 걸로 된 거죠’라고 말하고 나왔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사람이 일에 대해 어떤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자랑이 아니었고 자기를 지켜낸 슬픈 강함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꼭 면접에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도 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자기소개서에는 숫자 대신 기억이 담긴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한 줄의 기억을 기다린다
자기소개서를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지난 시간을 잠시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보다 “이 사람은 어떤 순간을 잊지 않았는지” 나는 그걸 더 알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수십 장의 문장을 읽고 그 안에서 진짜 한 사람의 시간을 찾는다.
자기소개서는 스펙이 아니라, 기억이다.
나는 그 기억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사담당자의 자리에 있다는 건 그 기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