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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노트] 아버지는 운전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주차는 가르쳐 주셨다

by 낙원
폴킴 - 비: 서두르지 않는 빗소리처럼, 천천히 가야 보이는 풍경들을 담아

"운전하면서 졸음 운전을 안 하려면 천천히 가라."

아버지의 이 말이 처음엔 이상하게 들렸다. 천천히 가면 오히려 더 졸릴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는 덧붙이셨다.
"천천히 가면 보이는 것이 많아서 구경하느라 졸릴 수가 없단다."

그땐 그냥 특이한 운전 철학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도 운전대를 잡고 살아가며 그 말이 달리 들렸다.
아버지가 전하고 싶었던 건 운전법이 아니라,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

늘 달리기만 하는 차의 수명은 길지 않다.
쉼 없이 달리면 결국 과열된다.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나도 삶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몇 해 전 밤이었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과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 사이에서 숨이 막혔다. 빨리, 더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조급함에 그만 커피를 쏟았다. 갈색 액체가 하얗게 정리된 서류 위로 번져나갔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일이 더해지니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천천히 젖어가는 서류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내쉬는 순간 아버지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천천히 가면 보이는 것이 많다."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운전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니었다.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셨던 거였다.

그 깨달음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버스를 놓쳐도 당황하지 않게 되었고,
길가의 작은 풍경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급하게 걷지 않으니 계절의 변화가 느껴졌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
그 길 위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이 실은 더 소중할 수도 있다는 것.
아버지의 조언 속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을 가르치신 게 아니었다.


도착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오늘도, 천천히 이어가는 삶의 낙원에서.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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