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장수 큰어머니~

아지매들의 술심부름하던 그때를 기억하며....

by 꿈꾸는 덩나미

큰집 대청마루에 아지매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들은 온종일 생선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쌀과 바꾸기도 하고 돈으로 팔기도 하는 생선 장수 아지매들이다.

해 질 녘 즈음에 장사가 끝나면 그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큰집에 모여 남은 생선을 지져 안주로 삼고 술상을 차린다.

술을 사러 가는 심부름은 보통 나와 친척 집 재연이라는 아이였다.

우리는 그 심부름을 무척 좋아했고 서로 하고 싶어 은근히 견제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큰어머니는 거스름돈을 심부름한 아이에게 몽땅 주었기 때문이었다.

술 멤버들은 대략 5명에서 어떤 때는 7명까지였다.

큰어머니, 우리 엄마, 장순이 엄마, 평자 엄마...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어머니들까지. 그들은 가까운 친척 아지매들이었는데 큰집이 그녀들의 아지트였다.


아지매들은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면 젓가락으로 상 모서리를 부서져라 두들기며 <찔레꽃>이니 <섬마을 처녀>라든지 <동백아가씨>등 그런 노래들을 불렀다.

술이 더 거나해 지면 노래를 부르면서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어린 내 눈에도 그다지 좋아 보이는 풍경은 아니었다.

술에 취한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어린아이가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명 볼썽사나웠을 것이다.

중간에 친구들이라도 만나면 나는 얼굴을 땅에라도 댈 듯 외면한 채 꽁무니 불이라도 붙은 모양으로 집으로 도망을 갔다.


큰어머니는 깡마르고 단아한 몸에 머리는 늘 쪽을 찌고 비녀를 했다.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지매들이 그렇게 술에 취해도 큰어머니는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동서지간인 우리 어머니를 동생처럼 챙겨주시고 맛난 게 있으면 우리 집에도 나누어 주셨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내 생일이 되면 큰어머니는 수박이나 참외 같은 여름 과일을 잔뜩 가지고 와서는 “우리 남이 생일이제?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었나?” 하며 챙겨주셨다. 그런 큰어머니가 좋아 큰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우리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동갑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장가를 가지 못한 아버지가 띠동갑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행복하게 살 무렵 두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큰어머니는 어린 동서가 무척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생선장사를 데리고 다니시며 일을 하도록 했다. 몸이 고달프면 아픔도 잊으려니 하면서.

그렇게 어머니는 장사도 배우며 술도 같이 배우게 되었다.


큰아버지 댁에는 6남매가 있었다.

큰어머니는 사촌오빠들이나 언니에 대해 늘 자애롭고 명석한 분이셨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에 비해 계산도 빠르시고 한글도 읽고 쓰셨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때때로 큰집으로 마실을 가곤 하셨는데 큰어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시고 TV(그 당시 큰집에 티비가 있었다)도 보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촌들은 모두 자수성가하여 먹고살 만큼 밥벌이를 했고 동네 사람들은 그런 큰집을 항상 부러워했다.

그래도 큰어머니는 생선 장수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을 고된 노동으로 수행하는 수행자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선을 머리에 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이후에 굴 양식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아지매들과 함께 큰집 대청마루에 모여 술상을 차렸다.

모이는 횟수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그녀들의 아지트인 큰집 대청마루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어머니의 넉넉한 인심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 같다.

그렇게 아지매들은 세월을 조롱하듯이 술을 마시며 함께 놀았다.


큰 집에는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고모가 한 명 있다.

나의 고모이기도 한 끝순이 고모는 큰어머니에겐 벗어버릴 수 없는 짐 같은 존재였다.

장애인인 시누이를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일이 큰어머니에게는 고통이었고 업보였다.

시집을 보내도 쫓겨오고 자식이 아님에도 자식보다 더 오랜세월 데리고 살아야 하는 그 심정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사촌들은 척 척 제 길을 찾아 분가를 했지만 고모는 평생 큰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토록 다정하고 아량도 넓으신 큰어머니도 고모한테는 그렇지 못했다.


나도 안다.

그건 큰어머니가 나빠서가 아니다.

장애인 시누이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 데리고 산다고 생각해보라.

내가 큰어머니 입장이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 도망을 갔거나 고모를 고아원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는 장애인을 위한 정부 정책이 어쩌면 그리도 없었는지. 장애인은 오로지 가족의 몫이었다. 큰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이 고모를 끌어안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내 눈에는 큰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저 고모가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그렇게 큰어머니와 고모는 한 세트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자식들이 다 떠난 큰집에는 늙은 큰어머니와 고모만 쓸쓸히 남았다.


큰어머니의 몸이 점점 나빠졌다.

생선장사 일도 그만두시고 집에서 소일거리로 지내셨다. 대청마루에 모이던 아지매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어느 날 더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큰어머니는 부산 사는 아들네로 가기로 했다.

부산에는 사촌 오빠들과 언니가 근처에 모여 살았다.

큰어머니는 혼자 남을 고모가 마음에 걸려 한숨만 내쉬었다.

"아이고~저걸 우짜면 좋노? 우짜면 좋을까?" 큰 어머니의 한숨같은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도 몇번을 들었다.

자식들 수발 받으러 가시면서 차마 고모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큰어머니가 부산으로 떠나시던 날 고모는 “성아~성아”하며 울고 뒤따라 갔지만

큰어머니를 태운 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점점 멀어져만 갔다.

큰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했다.


그것이 큰어머니와 고모의 마지막이었다.

큰어머니는 자신이 누군가의 짐이 되는 걸 제일 싫어하셨는데 결국 자식들의 짐이 되어 버렸다.

부산에서는 아들과 딸 집을 오가며 지내시다가 결국은 딸 집에 머무르게 됐다.

가끔 큰어머니를 뵈러 가면 집안에서만 지내서인지 뽀얀 얼굴에 흰 머리가 도시 할머니들처럼 세련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티가 전혀 나지 않아 신기했다. 하지만 고모에 대해서는 웬일인지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큰집도 큰어머니도 점점 온기를 잃은 채 삭아가고 있었다.

고모만이 삭아가는 집을 지키며 큰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년쯤 지난 후 큰어머니는 시신으로 통영에 돌아오셨다.

그때 고모는 꺼이꺼이 울며 큰어머니의 관을 끌어 안았다.

그 누가 큰어머니를 위해 이렇게 슬피 울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얼마 안 가 고모도 큰어머니를 따라가 버렸다. 교통사고였다.


주인 잃은 큰집은 빠르게 폐가가 되었다.

사람들로 법석이던 대청마루는 내려앉았고 마당엔 잡초만 무성했다.

추석이면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린 우리를 유혹하던 나무는 담쟁이 넝쿨에 잠식 되었고 길고양이들이 제집인 양 어슬렁거린다.

술상에 둘러앉아 세월을 조롱하던 아지매들도 하나 둘 떠나고 마지막으로 우리 어머니가 떠나셨다. 그리고 어린 나는 그때 어머니들보다 더 나이가 들어 있다.

그리운 큰어머니, 고모,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지매들~


지금쯤 모두 만나 어딘가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회포를 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취하여 <동백 아가씨>를 부르며 술 심부름을 갈 아이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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