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경제적 독립
지난 글에서는 성인 자녀의 독립을 위한 ‘적당한 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거리 안에서 부모는 어떻게 머물러야 할지, 그 기다림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페이스메이커.
육상이나 수영의 긴 레이스에서 속도를 조절해 주며 다른 선수가 자기 리듬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결승선을 함께 통과하지도, 승부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정 지점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며 함께 달리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물러선다.
자신의 이름은 남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온전히 걸음을 내딛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주는 사람.
나는 부모란, 자녀가 자기 걸음을 찾을 때까지 곁에서 발을 맞춰 주고, 이윽고 조용히 물러서는 페이스메이커 같은 존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할 땐 속도를 조절해 주고, 때로는 옆을 지켜주며, 마침내 자녀가 인생을 완주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사람.
넘어질 때마다 미리 손을 받쳐주어 대신 다치거나, 곧바로 일으켜 주기보다는, 도움을 원할 때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있어 주는 것. 그 여백과 기다림이야말로 자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모의 진짜 울타리가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키며, 자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엔 조심스럽게 한마디 건넬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권유자.
“얘야, 그 길이 맞는지 잠시 멈춰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니?”
그렇게 아이의 삶 뒷자리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머물러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부모의 머무는 태도가 진짜 힘을 가지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자녀가 스스로 서기 위해선, 마음의 독립과 더불어 경제적 독립도 반드시 익혀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온전한 독립이라 말하기 어렵다. 기꺼이 주고 싶은 마음을 조절하여 무조건 ‘지원’해주려 하기보다, 묵묵히 ‘지지’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좋은 부모는 모든 걸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고 싶은 마음을 인내로 견뎌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예전엔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자녀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지금, 그 말의 무게가 이제야 가슴 깊이 다가온다.
가끔 아이가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곤란한 듯, 미안한 듯, 어렵게 말을 꺼낼 때가 있다.
그럴 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묻고 만다.
“그래, 그럼 엄마가 도와줄까?”
머리로는 안다.
이제는 아이 스스로 지도를 그리고, 방향을 정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대응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그런데도... 그 잠깐의 힘듦, 그 망설이는 눈빛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고 만다.
아직은 어리다고, 지치지 않게 도와줘야 한다고, 자꾸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아이의 자립보다는 눈앞의 마음 편함을 택하곤 한다.
먼저 나서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풀어가도록 시간을 견뎌주는 것.
말처럼 쉽진 않지만, 부모인 나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다. 늘 다짐하면서도, 기다림은 언제나 내게 가장 어려운 숙제다.
우리는 자녀의 실패를 너무 앞서 걱정하고, 그 걱정을 사랑이라 착각한 채 경제적 개입과 감정적 간섭을 반복한다. 하지만 진짜 도움은 무언가를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믿고 지켜보는 일’이다.
자녀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어디에, 어떻게 쓸 계획이니?”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갚을 수 있을까?”
“혹시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니?”
정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답을 찾게 해주는 것. 바로 그 순간부터 경제적 책임이 시작된다.
실패도 자산이다.
조금 부족하고 어설픈 시절이 있어야, 돈의 무게와 삶의 가치를 온몸으로 배울 수 있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라 믿었지만, 때로는 덜 주는 용기가 더 큰 배려이고,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나는 책이 있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소년은 자라면서 끊임없이 나무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나무는 열매를 주고, 가지를 주고, 마침내 몸통까지 내어주었다.
소년은 자라서 노인이 될 때까지, 나무에게서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받아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그루터기 위에 말없이 앉는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는 끝내 설명되지 않았다.
기쁨도, 미안함도, 후회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이 남았다.
과연 소년은 행복했을까?
무한한 사랑을 받았지만, 사랑을 돌려줄 기회조차 없었던 그 관계에서 소년 역시 무엇인가를 잃은 건 아니었을까.
부모의 희생은 때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자녀가 책임감을 배우고, 삶의 균형을 익히며 힘을 길러갈 기회를 앗아가기도 한다.
이제야 나는, 자녀가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한 발 물러나 지켜보는 ‘기다림’ 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임을 깨우치게 되었다. 아이는 그 속에서 삶의 무게를 배워가고, 기대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결국 더 단단하게, 더 깊이 인생이 피어날 것이다.
진짜 사랑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모습이어야 한다.
부모도 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지켜야 한다. 자녀를 위해 모든 걸 내어주는 희생으로는, 결국 어느 쪽도 온전히 행복하기 어렵다.
자녀가 웃는 모습을 보면 부모가 안심되듯, 부모가 평온한 삶을 살 때, 자녀 역시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이 글은, 아들과 나 사이에 ‘여백 한 칸’을 잘 지켜내고 싶은, 고백이자 나지막한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