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 흰 눈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눈 위의 속삭임
하얀 눈이 낮게 내려 길 위에 고요를 덮었습니다.
그 위로 고양이 발자국 몇 점, 막 식은 체온이 머문 듯 또렷했습니다.
눈송이가 차곡차곡 내려와 자국을 감추자, 마음 어딘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일었습니다.
흔적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사라짐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을 남기는 약속이라고.
그 목소리는 오래 닫혀 있던 제 마음에도 은은히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 온기
“엄마, 첫 휴가 날짜가 잡혔어요. 집에 빨리 가고 싶어요.”
전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는 겨울 방 안에 번진 햇살 같았습니다.
얼어붙었던 제 마음이 눈처럼 소리 없이 풀려 내렸습니다.
그 한마디가, 닫혀 있던 제 마음에서 새어 나온 첫 번째 온기였습니다.
기다림의 시간
군문 앞에서 돌아서던 그날 이후,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목도리를 몇 번이고 감아도 남는 빈자리처럼, 마음 한편은 늘 시렸지요.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던 순간을 밤마다 되감다가,
조용히 숨을 고르며 두 손을 모아 기도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다치지 않기를.
따뜻한 국 한 숟갈 같은 하루가 아들의 시간 속에 머물기를.
걱정은 눈송이처럼 쌓였지만, 그 위에 믿음이라는 발자국을 하나씩 찍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맞이한 휴가의 날,
멀리서 “엄마!” 하고 불러주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세상이 한 톤 밝아졌습니다.
군복을 입고 의젓하게 서 있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너도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구나.”
그 순간, 수많은 걱정이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달라진 그림자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습니다.
말투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달라져 있었지만,
그 속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작은 그늘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그 그늘을 서둘러 덮지 않기로 했습니다.
외면하기보다 곁에서 함께 서성이며 기다려 주는 것.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사랑은 이제 그런 모양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선물
휴가 마지막 밤, 저는 아이에게 카드를 건넸습니다.
“이거 가져가라. 필요할 때 쓰고.”
아들은 “쓸 데가 없을 텐데요”라며 웃었지만, 그 카드는 곧 작은 마법이 되었습니다.
부대에서 햄버거를 사서 나누고, 치킨을 함께 먹는 저녁,
그 순간마다 아이의 웃음은 한 겹 더 밝아졌습니다.
“엄마, 오늘은 제가 인기쟁이가 됐어요.”
잔소리처럼 “카드값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니”라며 웃었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아이가 누군가의 저녁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동안,
스스로의 마음도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열리는 문
휴가를 마친 뒤에도 전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습니다.
“엄마, 저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동료들과 나누는 웃음소리 속에서,
아이가 이미 누군가의 버팀목이자 작은 리더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닫힌 문을 늘 먼저 걸어 잠가 둔 건 사실 제 쪽이었다는 것을.
아이는 그 문틈 사이로 햇살을 들여보내며,
다시 열 용기를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발자국처럼
어느 날, 다시 눈이 내렸습니다.
하얀 길 위에 찍힌 발자국은 곧 눈송이에 덮여 사라졌지만,
제 마음 안에서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습니다.
흔적은 사라져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서둘러 닫지 않으려 합니다.
그늘을 그늘로 인정하고, 문턱에서 함께 숨 고르며 기다립니다.
회복은 먼 훗날 갑자기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선택과 서로의 온기 속에서 매일 조금씩 열리는 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들과 나눈 햇살 한 줌, 공항의 첫 포옹, 전화기 너머의 웃음.
그 모든 순간이 눈 위 발자국처럼 시간 위에 또렷이 남아,
우리를 다음 계절로 이끌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