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상실의 가을, 결심의 겨울

by 마른틈

오랜만에 기모 원피스를 꺼냈다. 품이 아주 넉넉하고 기다란, 두툼하고 보드라운 안감이 기분 좋게 피부를 감싼다. 씻기는 조금 귀찮으니까, 대충 세수만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장목 양말을 꺼내 신고 운동화를 주섬주섬 신었다.

문득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모습이 겁쟁이 주제에 반항기를 숨길 수 없는 철없는 아이 같기도, 혹은 임부복을 입은 초기 임산부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시장통 같은 거리를 지나 여느 때처럼 병원으로 향한다. 처음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땐, 고작 이 20분 거리조차 힘겨워 몇 년을 택시나 타고 왕복했다. 그만큼 비루먹고 쓸모없는 몸뚱이였다.

병원에는 늘 아픈 사람들로 붐빈다. 그들은 언제나 조금은 예민하고 화가 나 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를 마주하는 직원들 역시 어딘가 조금씩 마모되어 있다. 매주, 혹은 매달. 기계적으로 병원을 찾을 때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축 처지곤 했다.

여전히 나는 병원에 다니고 앞으로도 다녀야 하겠지만, 이제는 허접하게나마 마라톤도 뛰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정도 길은 마실 나가듯 느긋하게 다니면 어렵지도 않을 일이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이 나부끼면 송솜하고 포근한 안감이 살갗을 간지럽히는 터라, 나는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이 된다.


초겨울의 하늘은 언제나 연하다. 파랗지도 하얗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 하늘색보다 조금 더 연한 미묘한 색감. 그 하늘을 물들이는 건 선명한 노란 단풍이다. 바람이 불면 우수수 흩날리며 떨어지는 잎들. 그것들은 마구 흩날려 세상을 노랗게 물들인다.

아, 가을이 떠나고 있구나. 이 가을의 생명력이 온 힘을 다해 마지막을 외치고 있구나.

나는 이토록 애처롭고 아름다우며, 어쩌면 조금은 대담한 그 가을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그러니까 이 가을이 싫어진 건 순전히 나의 탓이다. 나의 모나고 뾰족한 마음 때문이다. 가을은 여전히 쓸쓸하고 아름답거늘, 지치고 고단한 마음이 그 쓸쓸함을 미워했다. 그 아름다움을 투기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또 살아진다. 사람이란 게 그런 거지. 10만큼의 불행이 죽음이라면, 9.5만큼의 불행에 가까웠던 내가 아주 조금의 위로와 행운들로 상쇄되는 그런 나날들이다.

고작 이틀의 연락 두절로 ‘무슨 일이 있느냐’며 걱정하는 당신의 1만큼의 다정. 절박했던 마음에 화답해 주는 1만큼의 행운. 네가 힘들었던 것은 절대 유난 따위가 아니라며, 그간 어떻게 버텼냐는 1만큼의 위안.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랬으니까, 수확을 기대하는 1만큼의 설렘.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불행을 상쇄해 가며 나는 또 살아남았다.

나의 불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조금의 행복으로 상쇄되어도 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위태롭겠지. 그래서 그 불행을 해결하기 위한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우선 지금은 그것만이 최선인 거로, 그렇게 결론 내렸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다. 더 이상 내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밀며 탓하고 몰아세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그것만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을과 겨울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다. 마르고 버석한, 떫고 약간은 비릿한 냄새. 폐부에 서리가 낄 듯 서늘하게 들이차다가도, 뱉어내는 숨결에 가득 데운 열기가 밀려난다. 그래 인간도 이렇게 가을과 닮아있다. 나 살아내고 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생명력이, 퍽 애잔하고도 사랑스럽다.

느긋한 걸음으로 하늘과 나무, 떨어지는 잎새를 바라보다가 새로 연 베이커리 카페 앞에서 머뭇거렸다. 빵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진녹색과 버터 색으로 소담하게 꾸며진 그 가게의 문을 변덕처럼 열었다. 몇 종류 안 되는 빵 중에서 ‘바질 토마토 베이글’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다. 오픈 초기의 열정이 느껴지는 사장님의 밝은 배웅에 나직이 감사 인사를 건넨다. 그 옆 단골 커피집에서 연한 콜드브루까지 주문해 들고나니 두 손이 여간 바빠졌다. 아무렴 어떠랴. 손이 가득 찬 만큼 마음도 채워지는 기분이 어쩐지 썩 나쁘지 않으니 그거면 되었다.


평일 오후 네 시. 느긋하게 바라보는 이 일상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새삼 아쉬워졌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그 바쁜 일상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나를 상처 입히고 아프게 했던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쟁취한 것들로 이루어진 나만의 안전한 온실 속에서, 그 어떤 겨울도 두렵지 않은 마음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


바야흐로 상실의 가을과 결심의 겨울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겨주신 댓글들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몇 날이 지나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 읽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고단한 마음에 쉽게 답글을 달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