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분홍노루발풀

싱그러움이 가득한 7월이 시작되었건만, 주말이면 한라산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보고 싶은 꽃이 있었지만, 장마에 젖은 한라산은 안갯속으로 스며들 듯 숨어버렸다.


그러나 7월이 가기 전, 꼭 만나야만 하는 꽃이 있기에 나 역시 안개자락 속으로 조용히 발을 들였다.

이런 날엔 뱀을 조심해야 한다. 습한 날씨 탓에 뱀들은 유난히도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비가 그친 후, 그들은 몸을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혹은 꽝꽝나무 위에 올라앉아 한참을 머문다. 사람이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뱀은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척이 들리면 슬그머니 도망칠 뿐이다.


예전엔 ‘뱀’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등골이 서늘했지만, 오름을 오르며 깨달았다. 뱀도 우리와 함께 자연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독사에게 물린다면, 그 순간 자연의 품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다시금 깨닫게 될 테니까.


안개비에 젖은 숲은 축축했다. 뱀들만이 몸을 말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나무들도, 숲도, 촉촉이 젖은 몸을 말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 햇살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안개가 천천히 걷히자, 감춰졌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땀에 젖고 이슬비에 흠뻑 젖은 옷이 뒤범벅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백리향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깃마다 백리향의 향이 스며들었다. 숨을 들이쉬자, 그 향기에 취해버릴 듯했다. 멈추고 싶은 향기. 그 향기에 이끌려, 만나고 싶던 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유난히 붉은빛을 띠는 가녀린 줄기가 시선을 붙잡았다. 그 꽃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내가 찾고자 했던 분홍노루발풀이었다. 그러나 꽃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장마 탓이었을까. 그 여린 꽃잎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꽃이 말을 걸 듯,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smj2vaj2.png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백두산의 분홍노루발풀처럼 예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늦게 찾아왔다고 투정을 부리는 듯, 길게 내민 암술대가 뾰로통해 보였다.

나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시들어 있어도, 너는 여전히 내게 아름다운 꽃이야.”

“사랑한다는 건, 가장 아름다울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시들고 볼품없어도, 너는 언제나 내게 가장 소중한 꽃이야.”


그럼에도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쪽이 시렸다. 조금만 더 씩씩하게 나를 기다려줬으면, 하는 아쉬움. 그러나 꽃은 다시 나지막이 속삭였다.


“꽃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아. 바람 따라 피어나는 것도, 해를 좇아 피는 것도, 별빛을 따라 피는 것도 아니야. 우리는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피어날 뿐. 그러니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백두산까지 가지 않아도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 한라산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그제야 분홍노루발풀은 꽁꽁 감추었던 꽃잎을 살짝 열어 보였다. 붉은빛을 띠는 줄기 위로, 연분홍빛 꽃잎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궂은 날씨 탓일까, 어딘가 빛바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서 이 꽃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