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그늘 속에서
1958년,
8월 한여름의 뙤약볕이 전라도 끝자락의 한 초가집 지붕 위로 가차 없이 내리 꽂혔다.
볕은 지푸라기 틈을 파고들어 방 안 공기를 푹푹 찌웠다.
땀은 이마와 목을 타고 줄줄 흘러 옷깃을 적셨다.
“응애!”
그 뜨거움 한가운데에서, 한 아이가 세상에 나와 힘찬 울음을 내질렀다.
“장남이요! 이름은 지었소? “
“인성이라네.”
“고놈 참 잘 생겼구먼! 인물 참 좋소! “
산파가 탯줄을 자르고 인성을 어머니에게 안겼다.
기진맥진한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발가락을 하나하나 세며 속삭였다.
“잘 자라야지… 우리 집 기둥이 돼야지.”
새 생명의 울음이 마을 안으로 번졌다.
새로운 곳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마을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였고,
마을 사람들 얼굴에는 굶주림이 깊게 파여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아버지의 어깨는 무겁고 살림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아버지는 품을 팔러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았고,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밭일을 했다.
밥상에는 늘 보리쌀 죽과 짠지 한 조각이 올랐고,
숟가락 소리는 서러움과 섞여 귀에 맴돌았다.
“애들 이렇게 굶겨 죽일 순 없잖소. 미군부대 근처 가면 품삯이 좀 낫다하더이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짓던 아버지는
결국 강원도 산골, 미군부대 근처로 이주를 결심했다.
땅끝에서 땅끝으로의 이사.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굳었다.
떠나는 날, 인성은 동생과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걷고 또 걸었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 인성이 물었다.
“보리죽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려고 가는 것이니, 잔말 말고 걸어라. “
신발은 이미 닳아 구멍이 났다.
보퉁이에 담긴 건 담요 한 장과 바느질통이 전부였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자, 넘어가는 고개마다 풍경이 바뀌었다.
꼬박 이틀을 달려 도착한 그곳은 미군부대 담장과 철조망으로 가득했다.
군용 트럭이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수없이 오갔다.
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이제부턴 여기가 니들 고향이다.”
초콜릿의 천국
더 나은 삶을 약속한 땅. 그러나 인성에게 그곳은 여전히 배고프고 낯설었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인근 목재 공장에 취직하셨고,
어머니는 마을 밭일 품앗이를 다니셨다.
세월이 흐르며 동생들도 하나둘 더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터로 향하면, 인성도 서둘러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똘똘한 눈빛, 다부진 주먹, 검게 그을린 얼굴.
겨우 열 살 남짓한 장남에게는 지켜내야 할 동생들이 있었다.
젖먹이 동생 춘희를 업고, 넷째 미숙의 손을 꼭 붙잡은 인성 옆으로
규성과 화성이 뒤를 따랐다. 다섯 남매가 향한 곳은 언제나 마을 어귀, 미군 부대 앞이었다.
“기부미 더 쪼꼴레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콧물을 훌쩍이며 여기저기 기워 입은 흙먼지 묻은 옷차림.
조막만 한 아이들이 부대 담장 앞을 가득 메웠다.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겨루듯, 미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함성이 터졌다.
그 소란 속에 다섯 남매도 섞여 있었다.
“오빠, 배고파.”
“조금만 참아. 오빠가 쪼꼬레 받아줄게.”
트럭이 달리며 은박지에 싸인 초콜릿을 흩뿌리면,
인성은 빼앗기지 않으려 잽싸게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작은 포장지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마다, 인성의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형아 나도 줘 “
“알았어! 다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
작은 초콜릿을 조각내어 동생들 입에 먼저 넣어 주고
인성은 마지막으로 제일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혀끝에 달콤함이 퍼졌다.
세상이 멈춘 듯 배고픔도, 고단함도 모두 게 하는 맛.
인성은 눈을 꼭 감았다. 초콜릿이 사르르 녹는 그 찰나의 달콤함은
너무 버거웠던 그 어린 삶 속의 한 줄기 빛이었다.
라면 한 봉지
그날도 인성은 동생들을 데리고 미군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인성을 덮쳤다.
─ 인성쇼파공장, 그 시절의 기록 ─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실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