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봉지
인성은 겁이 나 뒤로 한걸음 물렀다.
전봇대처럼 거대한, 노란 머리 사내는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인성에게 쥐여주었다.
인성은 얼어붙었다.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이었다.
순간 겁이 났지만, 곧 마음속에서 불길처럼 환희가 일어났다.
“돈이다… 돈이라니!”
인성은 곧장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 작은 점빵으로 달려갔다.
오래도록 유리 진열장 안에서 바라만 보던 라면을 사기 위해서였다.
“형아, 우리 진짜 라면 먹어?”
“응! 오늘은 진짜 라면 먹을 거야 “
가게 주인이 라면 한 봉지를 건네주는 순간, 온 세상이 인성의 것이었다.
인성은 라면을 품에 꽉 쥐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품속 깊숙이 넣어 챙겨온 잔돈푼은,
일터에서 돌아오실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장판 밑에 숨겨두고
동생들과 함께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폈다.
“라면! 라면! 아싸 라면“
동생들이 신이 나서 가마솥 앞을 방방 뛰자 인성의 마음도 급해졌다.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게 전부라, 맛있다는 말만 알았지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무엇부터 넣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허둥대며 솥뚜껑을 열어 라면 한 봉지를 털어 넣자
불길은 세차게 일렁였고, 동생들의 눈은 기대와 배고픔으로 커져만 갔다.
“됐다! 먹자”
인성이 외치자 동생들의 젓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세상 처음 보는 라면맛에 인성은 넋을 잃었다.
“우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다냐! “
“형아! 진짜 진짜 맛있다! “
국물은 짭짤했고, 면발은 쫄깃했다.
허기와 서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칭찬하시겠지. 잔돈도 남겨왔고, 동생들 끼니도 챙겼으니까’
인성은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인성의 기대와 달랐다.
인성이 장판밑에서 조심스레 돈을 꺼내자 어머니의 얼굴빛이 굳었다.
“대체 이 돈이 어디서 난 것이냐! “
다그치는 어머니께 인성은 울먹이며 사정을 말했지만
돌아온 건 칭찬이 아닌 매서운 손길뿐이었다.
“돈을 받았으면 고스란히 어미를 줬어야지! 그게 뭣인 줄 알고 함부로 써! “
어머니의 싸늘한 눈빛은 인성의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잔돈도 남겼는데, 동생들과 배도 채웠는데..’
울음을 삼키는 인성의 입안에는
여전히 라면의 달콤하고 짭짤함이 맴돌았고 ,
그것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라면냄새가 채 빠지지도 않은 부엌에 한참을 말없이 서계셨다.
학교의 문턱에서
시가지에 자리한 큰 교실.
형님, 동생들이 북적이는 그곳은 인성에게 단순히 글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학교는 놀이터였고, 세상을 배우는 창이었다.
배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찼고 인성은 누구보다 학교가 좋았다.
하지만 배움보다 동생 돌봄이 먼저였다.
갓난아기를 두고 일터에 나선 어머니 대신,
인성은 막둥이를 업고 학교에 가야 했다.
등에 업힌 아기가 울면, 인성은 책을 덮고 들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찾아 젖을 먹여야 했다.
그래도 학교 가는 일은 인성에게,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어느덧 인성은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동네 친구들은 교복을 맞추고 새 책을 샀다.
책에는 잉크 냄새가 묻어 있었고, 아이들은 서로의 교복을 뽐냈다.
학생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진학을 기대하던 인성을 아버지가 불러 앉혔다.
“중학교에 가고 싶으냐”
아버지의 짧은 물음. 그 한마디는 일렁이는 인성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학생이라는 것. 그것은 인성에게 사치였다.
“동생들도 있고, 형편도 좋지 않으니... 일을 배울게요.
남들보다 먼저 시작하면 더 빨리 성공할 수 있겠지요."
아무 대답이 없으신 아버지.
인성의 가슴은 쓰렸고, 아버지의 담배연기만 허공을 메웠다.
국민학교 졸업날, 인성은 마지막으로 교실에 앉았다.
살포시 책상을 쓰담고 엎드려 나무 냄새를 맡았다.
‘나도 멋진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둘러멘 중학생이 되고 싶어’
열네 살 소년의 간절함은 분필가루처럼 교실 안에 흩날렸고
늦겨울 햇볕에 눈물이 나도록 반짝였다.
그리고 그해 봄. 산으로 들로 벚꽃이 흐드러지던 그날에.
얼마 전 태어난 막둥이까지, 6남매의 맏이가 된 인성의 발길은
학교가 아닌 목수 공장으로 향했다.
등에는 책가방이 아닌 장남의 책임감이 얹혔고
그 여린 손에는 책이 아닌 망치가 들려졌다.
─ 인성쇼파공장, 그 시절의 기록 ─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실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