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수용
어렸을 적부터 자존감이 낮고, 예민하고, 불안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의 당연한 수순일지 모르겠지만, 외모에도 자신감이 없었다. 화장도 못하고, 옷을 잘 입기에는 옷도 별로 없고, 옷을 사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살 수 있는 안목도 없고, 어지간히 외모와는 담을 쌓고 살았었다. 화장을 할 때에도 단점은 가리고 장점을 살려야되는데, 화장을 하면 할수록 얼굴이 답답해보였다. 화장을 하면 더 나이들어보인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미소가 예쁘면 좋았을텐데, 어릴적부터 무표정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지금도 일상속에서 짓는 대부분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마흔살이 되도록 웃는 모습이 어색한데, 표정연습을 해봐도 여전히 어색하다.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요즘같은 SNS시대에 사진 찍는 것이 불편하다.
외모이슈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는데, 거울속의 내 얼굴이 어지간히 못마땅했다. 내가 내 얼굴 보는 일이 이렇게 불만을 갖고 괴로운 일이어야 되나 싶어서 가끔 그 감정에 몰입이 되어버리면, 외모에 뭔가 시도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얼굴에 뭔가를 시도했고,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화장을 잘 하지 못해서 이를 보완하고자 큰맘먹고 한 눈썹문신은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몇년동안을 어색한 얼굴로 살아가게 만들었고, 입술 색이 없는 것이 싫어서 입술 문신도 했었는데, 비대칭하게 나와서 안하느니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외모에 대한 불만을 품고있다가 그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릴 때면 나는 종종 피부과에 가서 큰 돈을 지출하면서 당장의 미적인 효과는 좋지만 피부에는 해로울 자극적인 피부관리를 끊고는 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의 외모로 비하하며 공격하며 괴롭히다가 못견딜때쯤 뭔가를 시도해 왔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고, 나는 또 다시 외모에 불만을 갖고는 했다. 이런 식으로 외모를 깊게 의식할 때마다 스스로를 공격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해 왔다.
어느 날 거울속의 내 모습이 도무지 못마땅하여 문득 전문가에게 메이크업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비싼 돈을 내고 메이크업 전문가에게 내 얼굴을 보인 순간, 전문가는 나를 보자마자 눈썹문신을 지우라고 알려주고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고 튀는 눈썹을 죽이는 화장법을 알려주었다. 수십만원을 낸 그 메이크업 클래스에서 내 문제가 잘못된 눈썹문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눈썹문신을 지우러 갔다. 눈썹문신을 지우는 것은 눈썹문신을 했을 때보다 배로 돈이 들었고, 배로 아팠다. 외모를 더 낫게 개선해보고자 했던 눈썹 문신이었는데,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채로 몇년을 지냈다는 것이 속상했다. 그 몇년간 나는 내 외모가 싫어서 사진도 잘 찍지 않았었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게 잘못된 눈썹문신 때문이었다. 외모를 더 나아지게 만들고 싶다는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면서 내 자신을 도무지 좋아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내 외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외모관리에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늘 불만족스러웠고, 외모관리를 시도할수록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어 자존감을 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외모관리는 애초에 내가 잘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겼다. 수많은 시도 끝에 외모관리를 포기한 뒤에는, 그 반작용으로 다른 사람들이 외모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폄하하기도 했다. 화장도 잘하고 옷도 잘 입으며 헤어스타일까지 잘 관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꾸밀 시간에 차라리 일이나 자기계발을 하지.’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품었다. 그렇게 남을 낮춰볼수록 외모에서 더 멀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더 깊어졌다. 외모를 잘 관리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으로 살았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감당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스스로를 태워가며 방황했고,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번 생에서는 외모로 스스로를 미워하는 분량을 다 채워서인지 나이가 들면서 나를 미워하는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원래부터 있던 다른 감정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기혐오가 모든 감정을 덮어왔는데, 그 힘이 약해지자 비로소 원래부터 있었을 자기 수용과 자기 긍정, 자기 이해와 자기 포용 같은 감정들이 아주 조금씩 자리를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스스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외모관리가 아니라 스스로 외모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지 않을 정도의 그 기준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로 외모가 갖춰졌을 때 내 마음이 편한지, 어느 정도로 갖춰지지 않았을 때, 스스로가 싫어질 만큼 마음이 불편한지 조금씩 찾아나갔다. 외모적으로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으면 그 거슬리는 부분에 모든 신경을 다 써버리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준에 맞게 나를 정돈했을 때, 오히려 외모 쪽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만 외모를 관리하면 오히려 외모에 대한 신경을 끄고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었고, 외모를 방치할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아예 내려놓는 것보다 단정하게 외모를 가꾸는 편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한때 나는 외모관리를 하는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며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외모보다 내면이 자신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것 자체가 내면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외모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을 것이라면, 내면은 단단하고 떳떳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스스로를 미워하던 시기의 내면은 외면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내면을 돌보는 일은 외모를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서 차라리 외모를 가꾸는 쪽이 쉽겠다고 생각했다. 외모 외에도 직장, 돈, 진로, 인간관계 등 너무 많은 것들이 그 당시의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외모가 내가 가진 고민 중에 그나마 내 노력이 파고들 틈이 있어보였다. 외모 때문에 받는 부정적인 영향이라도 줄여나간다면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 질 것 같았다.
내 내면은 오랫동안 어둡고 우울하고 부정적이어서 외모를 가꾸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다. 땀을 흘려 체중을 감량하거나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거나 간단한 화장을 했을 때, 거울 속의 나는 덜 초라해 보였고, 그만큼 자기혐오도 누그러졌다. 내면을 다스리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처럼 늘 실패와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외모는 나한테 맞는 것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즉각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외모를 가꾸는 일은 나에게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주고 스스로를 덜 미워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주었다. 최소한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나를 괴롭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미 다른 모든 고민거리들이 나를 괴롭고 힘들게 하니까, 최소한 외모로는 나를 스스로 비난하지 말자고, 외모로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초라한 상태로 두지 않으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외모의 노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더 이상 외모와 관련된 것으로 스스로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젊기 때문에 한창 예쁠 나이에는 힘껏 내 외모를 비하하고, 스스로를 못마땅해하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마흔에 가까워져서 신체의 노화를 겪을 때가 되니 지금에서야 이 정도 외모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과거의 나라면 못마땅한 외모에 노화까지 고민해야 한다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도 젊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었는지 이제는 내 외모를 미워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외모를 나를 미워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왔는데, 사실 외모는 이용당했을 뿐, 나는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것 같다. 외모를 탓했지만,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금씩 바라보기 시작하니 외모가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외모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으니 좀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