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히어로

by 윙글

발품을 팔아 화실을 돌아보며 내가 원하는 방향과 맞을 만한 곳을 찾았다.

화실 측의 설명을 들을수록 마치 내가 이미 대학에 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입시미술이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으로는 늘 칭찬만 받았으니까.

학원 한번 못가 봤어도 상을 받았으니까.


남들 3년 할 거 나는 1년에 할 수 있을 거야.

더 열심히 하면 돼.

그렇게 생각하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지금 우리 형편에 불가능하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미 화실을 돌아다니며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고 머릿속으로 그린 나의 미래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에 재차 여쭤보아도 대답은 같았다.


입시미술 학원비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정으로 지출한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거기다 재료비까지 더하면 금액은 더 불어난다.


만에 하나 화실에 다닌다고 쳐도 대학 등록금이라는 더 큰 문제가 남는다.

처음부터 삼 형제 모두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잠시나마 모른 척 해 본 것일 뿐.


그때는 학자금 대출 같은 것도 알지 못했다.

그 시절에도 있었던가?

있었다 해도 우리 집은 정보에 취약했다.

가난할수록 정보에 취약해 혜택을 못 받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학원비를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의 마음이 편했을 리도 없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고 계신지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잠시 어떻게 됐었나 보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안되는구나.

처음부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부모님께 말도 없이 나 혼자 알아보러 다닌 것부터 바보 같은 짓이었던 거야.

애초에 안 되는 일인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여기는 이런 곳이었지.

어딜 감히 탈출하려고.


나는 좌절의 순간에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나 보다.

괜찮은 척, 무심한 척.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음… 화실은 다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이젠.

넌 그림과 함께 겨울을 나겠구나.

남들 다 애인과 함께 보낼 때… 불쌍한 것…

그래도 그릴 수 있다는 행복을 잊지 말고, 열심히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내 얘기를 듣기 전,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직접 찍은 해돋이 사진을 일기장에 붙여주었다.

함께 잘해보자고.

한겨울 추위를 버티고 6시간을 기다려 찍은 사진이었다.

너는 나에게도 희망의 기운을 전해주고 싶었나 보다.



1월 1일

모든 마음가짐을 새로이 할 때.

내일부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여야 할 것 같아.

이젠 새천년이니까… 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치?

해를 보면 마음이 무지 따뜻할 거야.

요 사진 자주 보고 소원 빌어. 2000년 첫 해잖냐.

우리 친구들도 모두 다 행복하기를… 넌 특별히 + α로 행복해라.



나는 너에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너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나에게 입시를 권유했다.



1월, 눈 많이 내린 다음날.

입시!!

비록 힘들겠지만 내 삶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된다.

너도 입시 그냥 포기하지 말고 한번 네 뜻을 펼쳐봐.

세상은 나름대로 공평하니까… 그걸 믿으라고.



너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는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너도, 다른 친구들도, 나 스스로도 나를 위로할 수 없었다.

참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좌절을 딛고 용기를 냈다.

공식적으로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늘 이렇게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너는 부러워했다.

강하다고.

너는 정말 강하니까, 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항상 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너.

정말 강해 보여. 아니,

넌 강해. 누구도 너를 이기지 못할 거야.

네가 져주지 않는 한은.

너는 언젠가 내게 삐삐 음성메시지로 머라이어캐리의 'Hero'를 녹음해 보낸 적이 있었다.

너에게 나는 그만큼 강하게 느껴졌나 보다.


There's a hero

If you look inside your heart


아니, 나에게 히어로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구나.

내 안에 있는 히어로를.

keyword
이전 23화한종이 뭐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