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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가꾸는 마음?

사는 일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by 김사임


"거기 씨앗 심었어요!"


텃밭을 밟고 가던 여자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앗! 그러나요?"

말끝을 흐리며 그녀가 슬그머니

고랑으로 발을 옮겼다.


남양주 강변 아파트에 살던 어느 봄날의

일이다.

아파트에서 강변 빈터에 텃밭을 조성해도 좋다는 방송을 했다.

농사는 문외한이지만 돌로 주워다

가장자리를 두르니 우리 텃밭이라 불릴 공간이 생겼다.

뒤늦게 달려온 주민들은 부러움 가득한 눈길로

우리 밭을 바라보았고,

인천에 사시는 친정아버지가 오셔서 손수 씨를

뿌리고 밭 틀을 잡아 주셨다.

북한강변에 자리 잡은 텃밭은 유난히 운치가 있었다.




우리 텃밭을 그녀가 밟고 지나던 날

그날은 유독 감정이 요동치던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딸아이가 참여한 미술대회와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 행사에 다녀온 길이었다.


딸아이는 반장이자 예능이면 예능 여러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 아이의 성공을 위해 이 한 몸 갈아 넣으리라!"

내 의욕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백일장에 참석해 보니,

다른 아이들은 이젤이며 각종 미술도구를 제대로 챙겨 왔는데

정작 우리 딸은 달랑 스케치북 한 권과 크레파스 한 통뿐이었다.


회사 다니는 남편 월급은 한 달을 겨우 메우기 바빴고,

의욕만 앞서고 부모로서 능력 없는 현실이 속이 상했다.


다른 아이들이 편하게 이젤에 기대 그림을 그릴 때,

우리 딸은 울퉁불퉁한 돌 위에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상태로 백일장 참여를 하게 되니 글이 잘 써질 리가 없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텃밭을 가꾸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텃밭을 가꾸는 마음은 자식을 기르는 마음과 같다." 이런 내용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백일장에 참여하고 모두 열정적이었다.

특히, 세련된 옷차림의 어떤 여자분이 말했다.


"어우, 시간이 부족해서 교정도 못 봤네요"

"저희 시어머니도 소설가시고 우리 집안은 다 문인이에요."


'아, 저분이 당선되겠네!'

씁쓸한 기분으로 그러고 말았다.






행사가 끝나고 텃밭에 들렀다.

텃밭에는 상추. 가지. 고추...

아버지가 정성껏 심어주신 채소들이

보기 좋게 잘 자라고 있었다.


텃밭과 북한강 상류 강물을 바라보니

딸아이 못 챙겨준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전 우리 텃밭을 밟고 지나가던 여자가

또 나타났다.

이번엔 씨앗이 뿌려진 두둑을 그대로 밟고 걸어왔다.

조금 전 말했는데 또 그러다니...


"거기 씨앗 심어졌다니까요?"


내 말에 감정이 실렸나 보다.

이 여자가 발끈하며 되받아쳤다.


"뭐 얼마나 처먹겠다고 난리예요?"


"씨앗을 밟지 말라는 거예요.

길이 있는데 밭을 밟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야, 무슨 작은 밭데기 하나 가지고 유세냐

내일 너네 밭에 똥물을 찌끄려버릴 거다"


정말 어이없었다.

그날 기분도 좋지 않은 데다 실수를 하고 되레 적반하장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가꿔주신 밭을 모욕하니 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밭둑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그 여자는 밭에서 소리 질렀다.


그 여자가 내려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육박전을 하자는 건가? 유치하기는...'

나는 소리쳤다.


"빨리 가서 밥이나 하세요!"


그렇게 아파트가 들썩일 만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다음날,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힘들었지만

혹시나 텃밭에 똥물을 뿌린다는 그 여자 심술이

심상치 않아서 텃밭에 나가봤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그 여자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집 텃밭은 점점 풀로 덮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일장에서 딸이 아니라 내가 쓴 글이

"최우수상"을 받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2등 상은 학교 선생님

3등은 그 문인 집안 그 여자분이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텃밭을 가꾸는 마음"은 자식을 기르는 마음과 같다"

고 썼던 그 글.

그 텃밭에서 고래고래 싸움까지 벌였던 내가 최 우수상이라니.


행사 날,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한복을 입고 무대 위에서 상을 받았다.

정말 아이러니했다.

사는 게, 이렇게도 웃겨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이후, 그 싸움을 벌였던 여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알고 보니 우리 딸 친구 엄마와 친구이고,

우리 동 경비 아저씨 며느리란다.


화해한다고 왔는데, 정말 놀랐다.

싸울 땐 내가 높은 밭둑 위에 있어서 몰랐는데,

눈앞에서 보니 덩치가 꽤나 컸다.


딸 친구 엄마가 말했다.

"이 친구가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 쌈닭인데

그날 놀라버렸데요!"


그러자 그 여자가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날 싸우고 불공드리러 갔다나.


나는 속으로 '그날 육박전 안 하길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상대가 엄지 척을 하니

얼떨결에 싸움에서 이겼다는 건가?


그 후로

또 한 명의 의리 있는 친구가 생겼다.


사는 일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는 거 같다.


그래서

더 살아 볼 만한 세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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