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다는 건
나를 잃어버린 다는 건 아닌데
난 마지막까지 나답게 살고 싶어
작년 첫 이식을 앞두고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멈췄다. 언제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한없이 길어지는 대기시간에 수없이 마음을 졸인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리 덕분에 첫 진료일도 맞추기 어려운데 난포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병원 진료까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혹여나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면 민폐 없이 출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병원을 아침 일찍 가보기도 했지만 속절없이 늘어나는 대기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업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출근시간은 늦어져도 오전 수업시간 안에 들어가면 그나마 괜찮기도 했는데 수업시간은 다가오는데 대기줄이 꿈쩍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다 졸아 타버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금방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택시 안에서 동동거렸다. 신고 온 하이힐을 챙겨 온 운동화로 바꿔 신고 택시에서 내려 강의실까지 전력질주로 뛰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선택과 집중이란 생각 아래 내 일을 내려놓았다.
첫 이식 후에 바로 임신했을 때에는 (비록 바로 유산이 되었지만) 이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을 했고 채취하는 기간에도 회사를 다녔으면 못 누렸을 편안함을 얻기도 했다. 아무리 길어지는 대기시간에도 초조해하지 않고 편안하게 책을 읽으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초기에는 시술 후 얻게 되는 2개월이 휴가 같았다. 채취 기간 동안 참고 있었던 밀린 파마와 염색을 하고 라면을 맘 편히 먹기도 했다.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창가 앞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난 10년간 누려보지 못한 느긋한 호사를 누렸다. 이렇게 쉬면서 건강한 나를 만들어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따뜻한 햇살에 내리는 창가 앞이 나른해지고 무료해졌다. 오랫동안 영어를 써왔던 머리는 점점 녹슬었고 하이힐에는 먼지가 앉았다.
나는 내 ‘일’을 무척 사랑했다. 강의하러 앞에 나서는 그 시간을 무척 즐겼다. 9센티 하이힐을 신고 강의실이 런웨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누비며 수업을 했다. 하루에 4-5개의 수업을 진행했는데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아드레날린이 계속 뿜어져 나와 집에 가는 길에도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살짝 쉰 목소리로 집에 돌아오면 내가 참 멋지다고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종종 번역 작업도 하며 퇴근 이후의 시간에도 영어를 이용한 또 다른 전문영역을 넓혔다. 열심히 노력하면 함께 따라오는 성과를 보며 더욱 열정적으로 내 일을 향해 오롯이 전진했다.
결혼과 육아 탓으로 퇴사해 직장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이르는 말로 경단녀라는 말이 있다. 요즘에는 경단녀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며 경력 보유 여성이나 경력 이동 여성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임신을 아직 못했기에 임준생, 임신 준비생에다가 할 육아도 없는데 육아를 위한 준비만으로도 경단녀가 되었다. 생기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는 게 과연 괜찮은가 생각을 해본다. 다음 달엔 이식할지 몰라서, 언제 다시 병원에 갈지 몰라서 등의 이유로 일 년 전 모습 그대로 멈춰있는 나에 대해 고민을 해본다.
“결혼은 하셨어요? 아이는요?”
“아직이요”
“계획은 있으세요?”
“계획은 있는데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면접이라도 보러 가면 이런 구질구질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이력서를 쓰고 일할 곳을 찾아보는 나의 모습에 ‘선택과 집중’으로 결정한 일을 이도 저도 아니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올라온다.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니 해야 맞을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다음 달 채취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냥 이곳저곳 공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본다. 어떻게 진행될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현실에서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력서를 쓰며 그냥 내게 위안을 해본다.
신발장에서 오랜만에 하이힐을 꺼내 먼지를 턴다. 거울 앞에 서서 신발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도 내어본다. 삑삑 거리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굽이 다 닳아 있다. 내일은 요 앞 구두방에 가서 굽을 갈고 와야겠다. 다시 이 구두를 신고 뿜뿜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