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선택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는 선택에 대해
이제 공식 퇴사일을 2주 앞두고 있다. 회사는 예전에 떠났지만 육아휴직 덕에 그간 회사라는 소속은 있었다. 실험 종료 시점이 오면 소속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를 보면 내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요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정리해 두기로 했다.
먼저 예상과 달랐던 두려움
예전에는 소속이 없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소속 없이도, 나로서 온전히 충분하기>라는 글에서 초년생 때 소속이 없던 일주일에 대해 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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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밖에 설 때의 두려움
그동안 늘 트랙 위에 있었다. 취업이 될 때까지는 졸업하지 않았고, 이직처가 확정되지 않고서는 퇴사하지 않았다. 단 한 번 트랙 밖에 있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일주일간 소속이 없었던 적이 있다. 첫 회사를 다니다, 대학생 때 인턴으로 함께 했던 스타트업에서 합류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직무로 일하고 있었고, 곧 죽어도 마케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던 터라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퇴사까지 했는데, 갑자기 그 회사가 확정은 아니었다며 기다려달라는 통에 갑자기 일주일 붕 뜨게 됐었다. (결국 입사하긴 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막막했던 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이 무서운 세상에 겁도 없이 그냥 퇴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날 밤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도 늦잠을 자면서 즐겨도 될련만, 불안한 마음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신림 자취방에서 불안감에 압도당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내 주변 모든 사람이 회사를 가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는 어떡하지?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과 남들과 달라진 시간에 압도되어 버렸다. 집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질식할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는데 쨍한 햇빛 아래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라서 하릴없이 신림을 걸었던 그 일주일, 세상의 틈으로 나만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휴직 기간이 끝나면 소속이 없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초조해질 거라 지레 겁먹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를 보면 소속이 사라지는 것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렵지 않다를 넘어 괜찮다 정도의 느낌이어서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달라진 것은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내가 그동안 버텨온 10년의 시간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의 나만 있어서 회사를 떠난 나를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소속이 사라지는 것은 마치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듯이 큰 두려움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오늘 해야 할 일 - 오늘 몫의 글을 쓰고 소설 수업을 듣고 육아를 하는 내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에서의 나뿐만 아니라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도 있고, 엄마로서의 나도 있다 보니 회사에서의 나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내 인생이 회사 중심에서 삶 중심으로 재편되었구나 했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살린다.
초년생 때는 아직 내가 경험해 온 것들이 없어서, 그리고 내가 나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다 보니, 다음 회사에 갈 수나 있을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든 것이 불투명해서 불안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실패와 선택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에 소속이 없더라도 이것은 ‘나의 선택’이고, 소속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다는 생각 덕에 두려움이 덜하다 생각했다.
'예전에는 소속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었고, 이제는 내가 나를 지켜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럼에도 여전히 몇 가지 두려움이 남아있는데, 공통점은 ‘돈을 벌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방식이 있을까?’하는 두려움이다. 가장 큰 두려움일 거라 지레짐작했던 소속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은 있는데 몇 가지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마케터로 돈을 벌고 글 쓰는 자아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어떤 마케터가 될 것인지?
나는 커리어적 강점이 브랜드 마케팅, 그로스마케팅 반반인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브랜드 마케팅적 강점 기반에 이를 숫자, 매출액으로 연결해 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 시장 상황상 그로스마케팅이 더 수요가 있다 보니, 내게 그로스마케팅 직무로 제안이 많았다. 물론 그로스마케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다시 그로스마케팅만 하면서 성과 압박이 전부인 구조 안에서 나 자신을 계속 증명해야 할 생각을 하면 두려웠다. 시장 상황상 브랜드 마케팅 공고가 요새 잘 안 보이는데 이를 고집할게 아니라 그로스마케팅으로 다시 달려볼까 생각할 때 물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숨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희영 영화감독이 설명한 영상을 보았다. 해녀마다 자기 숨길이가 있고 그 길이에 맞춰 바다에 머무르는데, 숨이 다 되어갈 때쯤 전복 같은 것이 보인다고. 욕심이 생겨서 전복을 따러 갔을 때 먹게 되는 숨을 물숨이라고 했다. 나의 숨길이가 정해져 있는데, 지금 다시 욕심을 부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마음건강이라는 가치에만 매달리다 마케터로서의 성장이 멈춰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움도 남아 있었다.
다음 회사를 정할 때 단 하나의 기준은 마음건강과 관련된 회사를 가겠다는 것이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마음건강 비즈니스는 아직 흑자전환이 어렵거나, 일상회복을 이야기하는 소비재 브랜드는 아직 초기 단계라 시니어 마케터나 마케팅 팀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범위를 넓혀서 광의의 마음건강이기만 하면 경험해 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광의로 인더스트리를 넓혀서 브랜드를 선택하고 나면, 이도저도 아닌 선택, 100% 내 마음이 동하지도 않으면서 마케터적 성장은 없는 회사에 가서 또 다르게 커리어 고민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나의 비전, ‘나답게 일하기와 살기’ 관련된 사업으로 바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고민했다.
그래서 취업으로는 내가 풀고 싶은 문제 ‘나답게 일하기와 살기’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인정하려 했고, 바로 사업을 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돈 또한 중요한 사람인지라, 당장의 수입에 흔들려 돈을 버는 선택, 내 기존 지향점을 잃어버릴까 가 더 두려웠다. 지금 바로 사업에 뛰어들면 돈에 지는 선택을 하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장기적으로 쓰고 싶은 글들을 찬찬히 써내고, 그걸 바탕으로 하나씩 사업으로 만들어나가길 기대하지 전속력으로 사업에만 달릴 자신이 없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었지?’라는 질문을 만날까 두려웠다.
나를 지우는 선택, 그리고 나를 키우는 선택. 두려운 선택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그간 '두려운 선택을 하는 게 맞다'라는 명제를 믿고, 그동안 두려워하는 것을 늘 선택해 왔다. 하지만 두려운 선택을 할 때 두렵지만 나를 잃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정리했다. 두려운 선택을 할 때 내가 더 내가 되는 방향으로 가는 거지, 나를 지우고 버티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지금 나의 두려움, ‘돈을 벌면서 나다울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안에, 나를 지우는 선택과 나를 키우는 선택이 섞여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정리해 두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지향하는 바가 명확한 상태고, 그래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더 명확해진 상태인 것 같다.
그래서 그로스마케팅부터 생각해 보면, 나는 브랜드의 지향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걸 매출액과 같은 숫자로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지 브랜드의 방향성은 배제한 채로 숫자로만 증명하라고 하면 나를 잃는다. 그러니 아무리 시장 수요가 많든, 사람들이 나를 그 직무로 찾든 상관없이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직무로 구직을 하자라는 것. 마케터로 일할 때 1순위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시간을 쓰고 싶은 인더스트리, 브랜드는 명확히 있다. 이걸 무시하고 그냥 아무 브랜드나 가는 것은 나를 잃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정말 원하는 브랜드에서 일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만 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나답게 일하고 살기’라는 기준에 맞는 브랜드인지를 꼼꼼히 따지기로 했다. 그리고 1순위 브랜드 마케터로 일할 수 있는지 2개 기준으로 일단 회사를 다니고 있겠다고.
마지막으로 내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 말로 내가 해결해야 하는 두려움이라고 정리했다. 다만 당장 사업에 뛰어들기에는 내가 돈에 지는 선택을 할 것도 두렵기에,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장기적으로 병행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해결책이었다.
실험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할 용기를 키우는 중이다. 겉모습은 여전히 회사 다니면서 글 쓰는 모습으로 같아 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어느 회사를 다닐지 결정에 있어서 ‘나답게 일하기와 살기’를 중심으로 찾고 있으니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예전에는 낮에는 숫자만 보면서 괴로워하고, 밤에는 의미를 찾느라 괴로워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낮과 밤 모두 나다운 일과 삶을 중심에 두는 과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소속이 없는 시기가 길어질지라도,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더 나를 지탱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