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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카이브 떠나려다 붙잡힌 이유

늦봄 아카이브, 이번에도 잘 부탁해~ ― 지노

by 콘텐츠플러스 Feb 04. 2025

통일의집 일을 하게 된 데에는 나의 기록학 스승이신 L 선생님이 있었다. 

“지노, 일주일에 이틀은 시간 내볼 수 있잖아?” 


아카이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계셨던 L 선생님 보시기에 강의와 프로젝트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해 보겠다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내심 아키비스트로 일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틀이라는 유혹에 끌려 2019년 여름이 끝나자마자 통일의집의 아키비스트가 되었다.


“매주 12시간”이라는 약속이 무색하게 아키비스트가 되기 위해서 몇 곱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늦봄봄길 기록들을 만나면서 조건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상자 속 숨어있던 기록을 발견하는 기쁨이 컸고 통일의집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날그날 작업을 할 때마다 나와 기록 사이엔 특별한 의미도 하나씩 늘어났다. 그 호사스러움 덕택에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만드는 과정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2022년이 시작되던 무렵에 나는 늦봄아카이브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복잡한 이유였지만 확실히 이제 여기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더 필요하다 생각했다. 내 마지막 일로 신임 아키비스트의 시작을 응원하던 그즈음 늦봄 아카이브엔 『월간 문익환』 팀이 될 또 다른 일꾼들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월간 문익환』의 주역인 홍산, 만당, 백총, 코스모스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21년 3월에 시작된 서울시 50+ 북부캠퍼스 교육에서였다. ‘디지털기록지원단 양성 과정’이라는 이름의 강좌는 통일의집의 이름을 걸고 한 것이었고 통일의집 사료를 이해하고 아카이브 하는 방법들을 나누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나는 그들과 강의자와 학생의 관계로 만났는데 그때만 해도 그들이 어떤 전문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인 지 잘 알지 못했지만 진지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 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된 건 그 후였다. 16주의 강의가 끝나자 50+자원봉사단을 꾸려 아카이브로 찾아왔던 것이다.


이제 와 밝히지만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지만 난감한 측면이 있었다. 2021년 가을 아카이브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때 아카이브는 다른 기관들과 협력해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원을 받은 정리사업은 막바지라 더 바빴고, 명지대 기록학 대학원 실습수업과 연계해 공동기획한 ‘크라우드 소싱 자원봉사 프로그램’도 첫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포화상태였지만 아카이브 입장에서 학생과 봉사단, 사업팀은 아카이브의 손님이었고 맞춤으로 우리의 노력과 시간을 배정할 필요가 있었다. 50+봉사단은 이틀로 나뉘어 하루종일 봉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할 내부 인력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카이브에 인턴이 오게 되면서 첫 난관은 해결되었다.


봉사자들과 더불어 시작한 일은 박용길 편지의 물리적 정리작업이었다. 2021년 여름부터 국가지정기록물 신청작업을 준비했는데 이때 실무적 준비를 한 셈이다. 그들이 담당한 일은 편지 실물을 순서대로 맞춰 나가며 위치번호를 매기고 편지 속 날짜정보를 목록과 비교해 확인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과 정확함이 요구되는 작업이고 그때 50+ 자원봉사단, 기록학 대학원생들이 없었다면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일이다. 봉사단은 편지를 영구보존용 봉투에 담고 번호 라벨을 붙여 위치를 관리하도록 돕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의 성격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일 같아 보이지만 사료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순서를 맞추는 등 정확성도 필요해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또 사료를 직접 만지고 들여다보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앉아서 몇 시간을 계속해야 하는 고된 일이기도 했다. 아카이브 인턴은 예민하게 그러한 상황을 파악해 전달해 주었다.


아카이브에서 이 봉사단의 역할은 무엇일까?


당장 노동 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브레인스토밍을 겸해서 오후에 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박용길 편지의 짝인 문익환 옥중편지는 이미 제목을 붙여 늦봄 아카이브에서 서비스하고 있었는데 이 편지들도 그런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천 통이 넘는 박용길 편지는 성격도 다르고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던 차에 기록을 직접 만지고 느껴본 능력자들이 떠올랐다. 그때 몇 편의 편지를 읽어보고 각자 제목을 붙여오기로 하면서 시작된 토의가 바로 ‘모범제목 짓기’였다. 이날의 회의는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웠고 백총이 정리한 후기는 곧 나의 자랑이 되었다. 이날은 나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실감 나게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카이브에서 이 봉사단의 역할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봉사단은 6개월의 자원봉사를 마치면서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늦봄 사료로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해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정해진 건 없었다. 16주의 강의, 6개월의 봉사 기간을 함께 보냈다. 이번엔 또 어떤 시간이 될까를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50+봉사단은 성실할 뿐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그간 쌓은 사료에 관한 지식과 이야기들을 더 깊이 나누고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이별하기로 되어있던 늦봄 아카이브와 다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하기로 정했다. 이번엔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협업하는 콘텐츠플러스의 팀원이다.



글쓴이_지노
초대 늦봄 아카이브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 편지를 정리하며 기록 관리에 ‘마음’이 깃들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때때로 잠이 안 올 때 늦봄 아카이브에서 편지를 찾아 읽는다.



● 아카이브에서 50+봉사단의 <통일의집 방문기> 콘텐츠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479


● 아카이브에서 50+봉사단의 <봉사활동> 콘텐츠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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