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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국 Nov 15. 2024

16. 꽃길만 걷는 아이를 원하는가?

불행할 권리

나는 부모형 분리불안을 앓고 있다.

아내 : 나 내일 퇴근이 늦을 것 같은데
나 : 나도 내일 늦을 것 같은데, 그럼 아버지께 부탁드려 보자!
아내 : 태권도에 1시간만 더 있으면 되는데 아버지께 부탁드리는 건 민폐가 아닐까?
나 : 아이들이 그 시간을 힘들어할 거야.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내 육아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다. 늦게 퇴근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아이들은 내가 늦으면 태권도장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늦는 동안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 노출될지 두렵다.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도 두렵다. 아내와 내가 동시에 출근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씩 회사에서 일찍 귀가하거나 휴가를 내게 되어 집에서 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일부러 두세 시간 정도는 일찍 하원을 시킨다. 아이들 없이 혼자 쉬는 내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의 매 분 매 초를 꽃길 정도가 아니라 꽃 바다에 잠식되도록 노력했다.

위 예화는 나의 치부다. 주변 부모들에게 나는 아이에게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부모의 대명사다. 일례로 아이들은 5세때 부터 스스로 샤워를 하였다. 그런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서 위 상황은 겉으로 드러내기 싫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내가 처음 부모형 분리불안이라는 말을 접한 것은 권영민의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라는 책을 통해서다. 작가는 아이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부모를 ’ 부모형 분리불안‘이라고 명명하였다.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길 때 불안하다는 예화도  들면서 해당 개념을 설명하였다. 개념뿐만 아니라 예화까지 딱 나의 경우와 일치하였다. 아이가 아빠와의 분리로 인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작가의 모습은 나의 자화상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이 ‘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아이의 모든 일생을 행복하게 해주려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주체가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아이가 내게서 떨어지는 것이 항상 불안했다. 그러나, 행복하게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된다. 아이가 나와 떨어지면 잘못될 것 같다는 망상이 가득하다. 그러나,  밝게 웃으며 즐거웠다는 아이의 후기를 들으면 어느새 마음이 진정된다. 매 순간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였다. 그리고 주 양육자가 ‘나’ 이므로 ‘내가 행복을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순간 행복한 인생이 가능할까?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인간 본성인 ‘욕망’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잘 되고 싶은 마음,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등을 만들어 인생이 고통스러워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나로 살지 않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 그리고 실망으로 인해 고통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어차피 인생은 힘들다. 고통에 큰 의미를 두지 마라.’라는 의미를 읽었다.


최진석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는 버스 예화가 나온다. 버스를 놓쳤을 때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방금 지나간 저 버스가 ‘나의’ 버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버스는 없다. 방금 지나간 저 버스는 말 그대로 ‘방금 지나간 버스’ 일 뿐이다. 새로운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아무 의미가 없는 과거에 의미를 두면 힘들어진다. 고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생에 당연히 존재하는 고통임에도 ‘내가 이 고통은 피할 수 있었는데!’라며 자만한다. 이런 생각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우리를 힘들게 한다. 아이의 소소한 고통, 실망감, 허탈감, 소외감 등은 당연한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의 인생은 항상 꽃길일 수는 없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에서 죽음을 앞두었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은 삶의 어떤 부분이 이미 지나갔기를 바라기도 해. 이 부분을 제거하거나 건너뛰기를 바라. 완전히 정신 나간 바람이 아닌가?‘라는 편지를 남긴다.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사치다. 아이 삶의 모든 행복, 고통, 인내 모두 아이의 인생이다. 나는 아이 삶의 모든 구성 요소를 사랑하고 아끼기로 하였다.



올더스 허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멋진 신세계’는 미래 사회를 표현한 소설이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마’라는 약을 복용한다. 이 약을 먹으면 어떤 힘든 감정도 잊게 되고 즉각 행복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그중 ‘존’은 고통이 없는 ‘멋진 신세계’로 넘어오게 되고 이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 내가 가장 격정적으로 느낀 부분은 존의 절규 부분이다. 그는 불행해질 권리를 달라고 한다. 나이를 먹을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등 모든 고통스러운 권리를 요구한다. 이제는 내 분리불안을 극복할 때가 왔다. 아이가 불행해질 권리를 보장해 주고 그 속에 있는 인생의 참된 보물을 찾도록 격려하겠다.


아이들은 고통을 이렇게 받아들일 분별 능력이 충분하진 않다. 작은 고통을 겪으면 끊임없이 ‘소마’를 찾을 것이다. 이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참고 인내하자. 작고 소중한 우리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자. 고통은 당연한 것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여 함께 해결해 나가자. 인생의 모든 과정을 사랑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주자.



이런 인생관은 많은 장점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선물은 ‘회복 탄력성’이다. 다음 글에서는 ‘회복탄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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