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걷기 (5) 숨이 차도 걷기 : 올레 8길
8코스는 월평아왜낭목에서 출발해 중문 관광단지를 거쳐 박수기정에 이르는 길이다. 험한 구간은 없으나 거리가 20킬로라 긴 편이다. 종반부인 논짓물에서 박수기정에 이르는 4킬로 남짓 구간은 휠체어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편하다. 도착점인 박수기정의 깎아지른 절벽은 8길의 하이라이트이다. 잔물결이 일렁이는 대평포구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박수기정과 뒤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산방산의 하모니는 직선과 곡선의 조합이 만들어낸 자연의 작품이다. 해녀들이 내쉬는 숨비소리까지 어우러지면 신비로운 기분마저 든다. 근래에 생긴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너른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이 길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제주 올레를 걷는 내내 느낀 것 중에 하나는 걷는 것과 농사짓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둘 다 몸을 써야 하는 점에서 그랬을 것 같았다. 계획했던 거리를 걷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잠시 눕자 하고 침대에 머리를 누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1코스에서 시작해서 7코스를 지나 누적 거리가 100킬로를 넘어가니 무릎도 아프고 피로도 쌓였다. 애초에 계획은 엿새를 걷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비가 내렸던 단 하루를 제외하고 날씨도 좋고 일행이 며칠 뒤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쉬지 않고 걸었다. 8코스를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중문 단지의 완만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경사지를 올라갈 때쯤 갑자기 숨이 찼다. 그간 쌓인 피로가 아래에서 위로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백 미터를 힘차게 달렸을 때 숨 가쁨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솟았다. 길에서라도 앉아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까이에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최대한 편해 보이는 의자를 찾아 배낭을 놓고 털썩 몸을 던졌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어 몸에 오른 열을 내리고 탄산음료로 당을 보충했다. 햄버거로 배를 채우고 나서도 일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같이 길을 걷던 선배에게 먼저 가시라 하고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한 번도 몸의 이런 반응을 겪어보지 못한 터라 살짝 놀랐다. 숨이 턱까지 찬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갈까 말까 혼자 갈등하면서 한참 동안 더 앉아 있었다. 호흡도 안정이 되었고 앞서 가고 있을 일행이 신경이 쓰여서 풀었던 등산화 끈을 동여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전히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숨이 차도 한 발 한 발 가자. 안 되겠으면 한 번 더 쉬었다가 가면 된다. 가다 보면 다다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회사에서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멤버들에게 해주던 말이 생각이 났다. ‘먼 길을 가거나 높은 산을 오르다 힘이 들 때는 멀리 보지 않고 바로 앞만 보고 걷는다. 포기하지 않고 방향만 제대로 잡고 한걸음 한걸음 가다 보면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 꼭대기에 올라 뒤돌아 봤을 때 우리가 걸어왔던 길은 좋은 추억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해보자.‘
걸으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걸으면 상념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논짓물에 가까워 갈 즈음 앞서갔던 동행을 만났다. 뒤처져 오는 내가 신경이 쓰여 페이스를 늦춰 걸어가고 있었다. 미안했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갈길이 지장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미안한 일이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살기에다 나이 든 지금은 민폐 끼치지 않기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