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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올레

4. 그 양반은 침 좀 아프게 놔주세요

by HONEY

쉬지 않고 걷다 보면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을 걷는데 돌이나 바위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오름도 오르내리니 가장 먼저 무릎에서 신호가 왔다. 다리도 뻐근해졌다. 보통은 발에 물집이 먼저 생긴다고 하는데 다행히 발은 문제가 없었다. 목표가 정해지니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걷다가 8코스 때 숨이 턱에 찬 경험을 했다. 무리해서 계속 걸었다가는 큰일이 날 거 같아 하루를 쉬었다. 그날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하루정도 쉬거나 걷는 거리를 줄이는 방법으로 체력도 보충하고 몸에 쌓인 피로가 임계치를 넘어가지 않도록 조절을 했다. 살면서 쉼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걷지 않는 날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방주교회, 추사관, 현대 미술관(사진 좌로부터)

올레길을 걷기 전부터 좋지 않던 무릎에 걷는 거리가 축적되니 크게 구부리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40매짜리 파스 한통을 다 쓰고 무릎보호대를 상시 착용해도 좋아질리는 없었다. 제주도에서 머물기 18일 차 되는 날에 어쩌는 수 없이 협재 해수욕장 인근의 한의원을 찾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임에도 의원은 삼춘들로 꽉 차 있었다. 제주말로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살아내어 왔을 지난한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친절한 여의사는 무릎이 아플만한 원인을 물었다. 나는 자랑스레 낯선이 앞에서 내가 걸은 거리를 말해주었다. 그때가 14코스쯤이었으니 누적 200여 킬로를 넘게 걸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떠벌리는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버린 후였다. 부끄러움이 소리 없이 밀려왔다. 의사 선생님의 과장된 리액션으로 나의 자랑은 목적을 달성했다. 침을 맞고 전기치료도 받으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가파도부터 같이 걸어왔던 동기가 의원에 동행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었지만, 기왕 온 김에 근육에 쌓인 피로도 풀 겸 친구도 옆 베드에서 치료를 받았다. 나는 “그 친구는 침을 아프게 놔주세요”라고 실없는 농담으로 선생님들을 웃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보다 한참을 더 오래 치료를 이것저것 하는 것 같았다. 훤칠한 키 때문인지 평소에도 허리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인도 당황한 듯했다. 괜히 나를 도와주러 왔다가 한참을 꼼짝 못 하고 엎드려서 침에다 생전처음 부황까지 떴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행은 내가 아프게 해달라고 한 것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허리를 부여잡고 나오면서 말했다. 먼저 나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우리는 이후로도 그 일로 서로를 놀렸다. 그렇게 즐거운 추억 하나가 쌓였다.


쉬면서 한의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올레길을 오래 걷는 사람에게 강추.(사진 좌) 쉬는 날에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여유도 부려보았다.(사진 중,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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