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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Oct 26. 2024

예쁘게 다듬어지는 자갈 되기

전화기 없는 곳에서 하루만 잠들고 싶다.

줄눈 시공은 입주 청소 전에 완료해야 하기에, 입주일이 정해지면 주로 줄눈 시공 날짜부터 확정한다. 일반적인 순서는 탄성 시공(베란다 및 세탁실 결로 방지 페인트칠) → 줄눈 시공 → 기타 시공 → 입주 청소 → 나노 코팅 및 새집증후군 처리 → 입주의 순서로 진행된다. 시공일이 결정되면, 통상 시공일 1~2일 전에 고객과 전화로 확정하고 색상 미팅 일정을 잡는다. 아파트마다 타일 색상이 다르기 때문에, 고객의 취향에 맞춰 직접 보고 선택하시길 권한다.  

   

어느 날, 초보 직원이 줄눈 시공 중 경화되지 않은 줄눈재를 마룻바닥에 흘리고 그 위를 밟고 다니는 실수를 했다. 화가 난 고객은 “바쁜 건 알겠지만, 처리도 못 할 일이면 하지 말아야죠?”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우리는 모두 무릎 꿇고 2시간 넘게 줄눈재를 닦아내야 했다.     


이 외에도 시공 중 다양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시공 범위가 아닌 곳에 추가 작업을 요구하는 고객, 입주 청소와 시공일을 겹치게 잡은 고객, 색상 선택 후 시공된 색상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고객, 작업 후 예상했던 느낌과 다르다며 재시공을 요구하는 경우 등 다양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 테니 본인 집은 무상으로 해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AS 요청 시 아이 낮잠 시간에 맞춰 달라는 요구로, 같은 시간에 3일 연속 방문했던 일도 있었다. 다양한 고객의 요구와 문제 상황을 처리하면서 지쳐갔다. 식사도 제대로 못 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 역시 과중한 업무에 힘들어했다. 나는 모든 시공의 입금, 정산, 시공 확인까지 관리하며 바쁜 날들을 보냈고,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아침 6시에 울리는 전화는 일상이었다. 일이 바빠지자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줄눈 시공팀은 총 4~5팀으로 구성되어 탄력적으로 움직였고, 매일 고객 미팅은 내 몫이었다. 아침 9시부터 30분씩 6가구 이상 고객들과 색상 미팅을 하면 오전 3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을 먹을 시간도 부족했지만, 우리는 항상 고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부터 고객의 화난 목소리로 전화가 울렸다. 줄눈이 엉망이라며 전부 뜯어내고 새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다른 업체가 입주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아파트의 하자를 체크하며 청소 중이었다. 줄눈 상태를 확인했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다. 고객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묻자, 고객은 청소 업체 직원이 줄눈이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고 전했다. 청소 업체 사장은 “줄눈은 잘 모르지만, 조금 덜 들어간 것 같아서 고객에게 더 넣어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라며 해명했다. 고객은 오해한 것이었다.     


입주 시장에는 다양한 업체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다른 업체의 잘못을 들추는 경우도 있어, 고객과 업체 간 불화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고객에게 “원하시면 다시 시공할 수 있지만, 현재 상태에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오해는 풀렸지만, 깨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현장으로 돌아와 서럽게 울었다. 잘못하지 않아도 욕을 먹고,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물론 내가 실수를 하거나 너무 바빠 놓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줄눈 업을 처음 시작할 때, 일이 없어 하루 한 집만 시공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어찌 보면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현장이 거의 끝날 무렵 동생들과 밥을 먹으며 “지금은 그냥 전화기 없는 곳에서 하루만 잠자고 싶다”라고 했던 내 말이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고객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다. 무조건 ‘죄송합니다.’가 인사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고객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리를 지르는 고객에게는 웃으며 대응할 수 있고, 자기 말만 하는 고객에게는 경청하며 호응할 수 있다. 시공하는 동안 고객과 농담을 나누며 일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은 그때의 경험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물, 바람, 비를 맞으며 깎이고 깎여 예쁘고 동그란 자갈이 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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