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물건을 다룰 때는 당연히 잘할 수 있다는 착각
월급을 받아도 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다
편하게 무엇하나 할 수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매일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화가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건드리기만 하면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고 웃음기는 사라졌다.
기약 없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기에,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그까짓 거 뭐라고, 줄눈시공 한번 배워보자!
그래, 눈감고 딱 1년만 배워보자. 죽기 살기로 해보자. 지금 밑바닥이라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
결심하고 바로 동생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동생은 줄눈쟁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입주 박람회, 맘카페 입점등을 하면서 회사의 로고와 유니폼도 만들어 브랜딩을 하고 있었다.
하루를 36시간으로 활용하며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워 보이는 것도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줄눈시공을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자재들이 필요했다.
줄눈재, 안료, 매지를 제거하는 수공구부터, 마스킹테이프, 청소기까지 수십 가지 장비들이
테트리스 해놓은 것 마냥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있다.
간단해 보이는 공정들 안에서도 디테일하고도 섬세함을 요구하는 일들도 많았다.
나의 처음 작업은 기공들이 백시멘트(매지)를 제거하고 나온 매지분진들을 청소기를 돌리는 것이었다.
욕실, 현관, 베란다, 세탁실로 5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먼지 하나 없도록 말끔히 청소를 해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오면, 투명한 매니큐어 같은 액체를 줄눈재(주제, 경화제가 있고, 폴리우레아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그 안에 안료(페인트로 표현하자면 조색제인데 운모라는 돌가루나 참숯, 유리등 여러 가지 재료들을 곱게 갈아낸 분말이다. 요즘은 액체인 것도 있다)를 넣어서 색을 입힌다. 하얀색 우유에 미숫가루를 넣어서 열심히 섞으면 미숫가루색 우유가 되는 것과 흡사하다. 안료와 잘 믹스된 줄눈재를 40ml, 90ml의 작은 튜브(페트병 같은 스포이드처럼 생긴 공병)에 넣어서 U자로 파놓은 줄눈안에 단차(타일의 높낮이차이)를 고려해서 넣어야 한다. 보기에는 단순한 작업 같지만 줄눈재의 점도도 알아야 하고, 가사시간까지 체크하며 줄눈재의 양을 조절하여 간격에 딱 맞게 주입을 해야 한다. 그래야 흐르지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매지분진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야 한 번에 줄눈이 주입되어 탁 떨어지는 라인을 만든다. 줄눈을 주입하는 과정을 '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줄눈을 쏘다가 매지분진이 나오면 그 부분을 다시 걷어내고 쏴야 한다. 가사시간이 지난 줄눈재는 경화가 시작되어 굳어가기 시작하고 사용할 수가 없다. 시간 맞춰 양을 조절해 준비한 줄눈재로 한 번에 모두 쏴야 하는데, 걷어내야 하는 불필요한 과정이 생겨나면 손실이 생긴다. 일을 잘하는 줄눈쟁이는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자재, 시간을 줄이면서 반듯하고 정확한 시공을 하는 것이다.
줄눈시공이 매끄럽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자꾸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런 것을 알 턱이 없는 초보인 나는 집안에서 청소하는 것처럼 청소기를 돌렸다가 엄청나게 혼이 났다.
“내가 청소기 돌리는 방법부터 알려줘야 하나?
청소기는 돌리는 것이 아니라 빠는 거야!!! 제대로 좀 보고 한줄한줄 빨아내”
그때 줄눈쟁이들이 청소기 잘 빨아야 한다고 강조한 이야기를 잘 못 알아 들었다.
내가 보기엔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었다. 한 줄 한 줄 보며 매지를 한 톨도 남김없이 빨아드려야 한다는 소리였다는 것을 나중에 줄눈을 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줄눈시공의 모든 공정 하나하나가 허투루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은곳에서라도 실수가 나오면 손실로 연결되기 때문에 예민하게 시공을 해야 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청소기 돌리는 것, 나에게는 익숙한 청소기조차도 제대로 못해서 엄청나게 혼이 났으니 내가 과연 잘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자존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매일 듣는 잔소리에 자존심은 집안에 꽁꽁 묶어두고 나와야 했다.
제일 우선인 줄눈시공 자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몸으로 익여야하는 노하우들은 내가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것으로 소화하고 만들어내야만 했다.
내가 익숙한 물건을 다룰 때는 당연히 잘할 수 있다는 착각은 기술을 익혀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장비들을 다루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차근차근 나도 줄눈쟁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