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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Oct 19. 2024

소설 <자생화> 01

아무래도 새벽 시간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길거리는 어둠에 잠기고, 가로등에 간신히 매달린 하루살이들만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사람들의 부재로 거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켜버렸다. 음산한 침묵을 깨뜨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사이로, 그녀는 마치 달이라도 쫓는 듯 다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찬 바람에 흩날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캡모자, 낡아 늘어진 긴팔 티셔츠와 보풀이 잔뜩 낀 반바지 차림. 급히 나온 듯 보였지만, 스물두 살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택시에 올라탄 그녀는, 택시가 텅 빈 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의 오지랖 넓은 질문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오직 휴대폰 속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작은 화면에 온 신경이 몰두된 듯, 주위의 소음은 그녀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라디오 소리를 키웠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 재개발이 멈춘 채 버려진 구역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에 빼곡히 들어선 판잣집들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폐허처럼 낡아버린 이곳의 기운이 온몸을 감쌌지만, 그녀는 그저 목적지만을 향해 서둘렀다. 드디어 발끝이 멈춘 곳에는 허름한 집이 있었다. 우편물에 적힌 이름을 다시 확인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 손잡이를 돌려본 그녀는 문이 잠겨있지 않음을 깨닫고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계세요? 지원아, 나 왔어.”


현관문을 열자, 술과 곰팡이 냄새가 뒤엉켜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내며,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어 조심스레 집 안을 살폈다. 바닥에는 먹다 만 컵라면 용기와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방 한편, 한 남자가 술에 취한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인기척에 남자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지원이? 지원아… 어디 갔었어!”


남자는 지원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와 두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의 한 손이 뱀이 먹잇감을 탐색하듯 옷 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놀란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압도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야! 내가 한 번만 더 집 나가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이 지원의 친구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그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어갔다. 실랑이가 계속되자 공포가 밀려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격분한 남자는 소주병을 바닥에 깨뜨리고,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들어 그녀의 목에 대며 낮게 속삭였다.


“닥쳐. 죽기 싫으면.”


붉은 핏방울이 티셔츠 목선 아래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한 손은 유리조각으로 그녀의 목을 짓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졌지만, 이내 두 다리가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 온 힘을 다해 그의 복부를 걷어차는 순간, 그의 몸이 벽에 세게 부딪히며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공간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고, 이곳에 왜 왔는지도 잊어버린 채, 본능적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불안이 발끝까지 차오르며 그녀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그 소리는 가슴 깊숙이 서늘한 불안을 남기며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응애-”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그때, 지원의 문자메시지가 스치듯 떠올랐다. 아이를 살려 달라는 그 간절한 요청. 그녀는 그 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재차 확인한 후, 그녀는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낡고 떨어진 문고리가 달랑거리는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세면대 위에 위태롭게 얹힌 갓난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의 작고 연약한 모습은 그녀의 심장을 저릿하게 했다.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어 119를 누르려 했지만,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차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해가 뜨고, 아기가 계속 울어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결단을 내린 그녀는 울음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망설임을 뒤로하고 아기를 슬며시 안아 들었다. 거짓말처럼 아기는 곧 잠잠해졌다.


그녀는 일단 이 아기를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지원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는 정말 죽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로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그녀는 아기를 안은 채 자신의 흔적을 서둘러 지워나갔다. 남자의 죽음은 그녀의 삶에서 지워야 할 과거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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