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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23. 2024

청유자

청유자와의 첫 만남

어느 가을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완도에서 온 작은 택배 박스가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남편이 그제야 얼마 전 청유자를 주문했다며 수줍게 소개한다. 항상 제철 식재료와는 이렇게 마주한다. 주로 제철에 나는 채소를 오프라인에서 보고 알게 되는 나와는 달리 항상 한 발 빠르게 SNS에서 제철 식재료를 접한 남편은 망설임 없이 주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나는 퇴근길마다 여러 제철 음식들과 느닷없이 첫 만남을 가진다.


청유자로 뭘 하자고 미리 계획하지 않아도, 제철 과일이 일단 우리 집에 오면 바로 손질에 들어간다. 늦은 밤이라 먼저 자도 되지만 향긋한 청유자를 자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주방에 가서 도마와 칼을 쥐었다. 칼질 한 번에 팡팡 터지는 청유자 향기. 어느새 청유자밭 한가운데 와 있는 듯하다. 레몬, 라임 같은 게 우리 집에 오는 날은 흔치도 않거니와 갈랐을 때의 그 향긋함 때문에 남편을 제치고 레몬, 라임을 손질하는 건 모두 내 차지다. 청유자도 그 못지않게 만족스럽다.


지금은 청유자가 나는 계절이란다. 사실 유자차를 주로 겨울에 먹은 기억만 있지 유자의 제철이 언제인지 잘 알지 못했다. 청유자는 가을이 깊어지는 지금, 유자는 겨울에 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청유자는 짙은 초록의 생김새와 상큼함 때문에 막연히 봄이나 여름에 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귤 식물인지라 날이 추워질 때쯤 만나볼 수 있는 거였다. 엔진오일은 언제쯤 가는지, 세탁조 청소 주기는 얼마만인지 같은 건 자꾸 잊어도 이런 건 절대 안 잊힌다. 나는 오늘부로 청유자가 나오는 시기를 아는 사람이다. 10월의 마지막 연휴인 한글날이 지나고 올해는 크리스마스까지 더 이상의 연휴는 없다고 선언할 때 즈음이다.


청유자


유기농 청유자 1kg을 샀는데 딱 10알이 왔다. 박스를 열자마자 싱그러운 청유자 향이 오감을 깨운다. 비타민C가 공기 중으로 날아와 피부로 바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퇴근 후의 피곤함도 가시게 하는 상큼함이었다. 남편은 청유자 껍질을 따로 벗겨서 유즈코쇼를 만든단다. 청유자 껍질이랑 청양고추랑 뭐랑 넣어서 다데기처럼 만드는 건데 고기나 회에 올려먹으면 별미라고 한다. 유즈코쇼는 3주나 숙성해야 한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요리인데 검색해 보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예전부터 만들어먹고 있었다. 나 빼고 맛있는 걸 해 먹는 사람들을 보며 새삼 나의 요리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세상에 먹어봐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느꼈다.


유즈코쇼


껍질을 벗긴 청유자를 청유자청으로 만들기 위해 반으로 갈랐더니 절반이 씨인 것 같다. 나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씨가 많아서 기껏해야 레몬씨나 빼본 초보 살림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유기농이라 그런가? 뭐가 잘못된 거 아니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열심히 청유자를 검색했다. 몇몇 블로그들의 사진에서도 씨가 잔뜩 박힌 청유자의 단면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안심했다. 내년엔 씨가 잔뜩 들어있어도 놀라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씨를 빼겠지. 처음이라 서툴고 처음이라 배울 게 많다.


젓가락으로 청유자 씨를 열심히 뺐다. 이걸 심으면 청유자가 날까? 이 씨를 들고 청유자 과수원을 열어도 될 정도였다. 

씨를 다 뽑아버려 모양이 흐물 해진 청유자를 얇게 썰어서 설탕과 켜켜이 쌓은 후 청유자청을 만들었다. 하루 동안 숙성하고 오늘 저녁에 마셨더니 향긋하고 상큼하다. 마트나 카페에서 파는 유자차가 너무 달아서 별로였는데 이건 달지 않아서 내 입맛에 딱이다.


청유자청


문득 소금빵, 요거트아이스크림이 유행하는 것처럼 청유자가 유행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남편이 청유자를 SNS를 통해 처음 알게 됐듯이 SNS에서 청유자 유행하여 청유자를 찾아 먹는 게 꽤나 힙한 일이? 그땐 청유자 농장 오픈런을 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어느 가을밤을 청유자 향으로 기억하게 될까? 적당히 달달한 차는 약간의 상상력도 키워주나 보다. 저녁 산책 후 따뜻한 티타임이 좋아지는 계절이다. 아직도 입안에 청유자 향이 잔뜩 머금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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